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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Jan 15. 2019

타인에게 말 걸기

피터 패럴리 감독, 마허샬라 알리, 비고 모텐슨 주연의 영화 <그린북>

주제는 선명했고 연기는 완벽했으며 감동은 오래 남았습니다. 2019년 새해 벽두부터 이런 영화를 만날 수 있다는 건 행운이었습니다. '그래, 영화는 이렇게 만들어야지!'라는 탄성이 절로 나오게 하는 영화 <그린북>. 절제된 감정과 적절한 유머, 수려한 연기와 조화로운 음악, 식상한 주제로 맛깔나게 차려낸 탁월한 연출과 구성, 작품성과 오락성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은 명품. 피터 패럴리가 <덤 앤 덤머>, <메리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등 주로 코미디 영화를 만든 감독이란 사실을 알고 나면 더욱더 이 영화의 가치는 빛납니다. 

영화 <그린북>의 두 주인공 토니(좌)와 셜리박사(우)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어디선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인공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와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는 서로 닮은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상극의 존재들입니다. 흑인 천재 피아니스트인 셜리 박사와 이탈리아계 백인 운전사 토니는 그 피부색만큼이나 학력, 취향, 기호, 식성, 성품, 교육 수준, 성장배경 등이 서로 다릅니다. 당연히 두 사람이 사용하는 말투와 언어는 크게 다릅니다. 예술과 음악 분야 박사학위 소지자인 교양 넘치는 셜리와 으름장과 주먹이 난무하는 유흥가를 주름잡던 '떠벌이 해결사' 토니가 사용하는 언어와 발음, 표현방식은 매우 다릅니다. 언어는 존재를 규정합니다. 그래서 셜리 박사가 토니를 운전자로 고용한 뒤 처음 하는 충고가 "나와 함께 하려면 발음과 단어를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영화 <그린북> 한 장면

이 영화의 구성이나 주제는 지극히 단순합니다. <그린북>이라는 영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인종차별을 다루고 있으며 백인과 흑인이라는 상극의 두 사람이 서로 대립하는 타자에서 조금씩 상대를 이해하며 소통하는 영화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그 단순한 구도와 익숙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뜨거운 감동과 여운, 시원한 웃음과 후련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는 것은 무엇보다 편리한 도식을 깨고 우리의 고정관념을 무너뜨린 데 있을 것입니다. 인종차별을 다루는 많은 영화의 기본 도식은 우월적 지위의 백인과 억압받는 흑인 혹은 유색인종이라는 대립구도 속에서 비인간적인 차별의 불합리성, 부조리를 드러내는 방식을 취합니다. 제프 리콜스 감독의 영화 <러빙>이 그랬고 테오도어 멜피 감독의 <히든 피겨스>, 테이트 테일러 감독의 영화 <헬프>도 그렇습니다. 이런 영화들은 억압받는 흑인 혹은 유색인종의 상처가 크면 클수록, 억압하는 백인의 억압 강도와 잔혹함이 강하면 강할수록 관객들의 감동이 클 거라고 착각하는 실수를 범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이런 영화들은 감정의 균형이 무너지고 연기자들의 연기력이 바닥을 드러내는 순간 진부해지기 쉬운 위험성을 안고 있습니다.  그 부담은 관객들이 고스란히 떠안아야 한다는 것도 참 난감한 일입니다.       




그린북

'그린북'이란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1960년대 미국 남부를 여행할 때 흑인들이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식당이나 숙소 등을 알려주는 흑인 운전자를 위한 안전 여행 지침서입니다. 조금 주의 깊은 관객이라면 영화 제목에서부터  이미 이영화가 인종차별을 다룰 것임을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화의 시작은 우아하고 교양 있고 학식 있고 예술적 소양까지 겸비한 흑인 셜리가 단순 무식 과격한 백인 토니를 개인 운전사 겸 로드 매니저로 고용한다는 설정에서 우리의 예상을 살짝 흔들어 놓습니다. 품위와 교양, 실력과 학식을 모두 갖춘 완벽한 우월적 지위의 흑인 주인공과 반칙과 속임수, 품격과는 거리가 먼 막무가내의 삶을 살아온 피고용인인 백인. '어, 이거 뭐지'하는 가볍지만 신선한 충격과 함께 이 영화는 무엇보다 우리의 고정관념을 우리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깨면서 차별의 문제는 고정관념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린북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procrustean bed)라는 용어는 나그네를 잡아다 자신의 침대에 뉘어보고 침대 길이에 비해 키가 더 크면 신체를 잘라 죽이고, 침대 길이보다 키가 작으면 늘려 죽였다는 그리스 신화 속 괴물에서 유래합니다. 자기의 틀에 맞춰 타인의 생각을 재단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려는 고집 세고 독단적인 사람을 나타내는 심리학 용어입니다. 영화 속에서 토니는 흑인들은 켄터키 프라이드를 즐겨먹고, 클래식 음악보다는 아레사 프랭클린 같은 소울, 블루스, 재즈를 즐겨 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의 소유자입니다. 그런 고정관념이 토니로 하여금 흑인들이 사용한 컵을 쓰레기통에 버리도록 하고, 운전을 해줄 수는 있어도 짐은 들어줄 수 없다는 고집을 부리게 합니다. 백인들이 흑인을 타자화하여 불결하고 위험하며 미천한 존재로 규정짓고 자신들과 동등한 자격을 누릴 수 없는 존재로 대우하는 인종차별의 근저에는 이런 고정관념이 놓여있습니다. 

흑인 여행자들의 안전한 여행을 위한 그린북

불합리한 고정관념을 깨는 데에는 선택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셜리 박사는 더 많은 돈과 편안함을 포기하고 위험하기 그지없는 남부 투어를 멈추지 않습니다. 맘에 드는 양복 하나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직접 입어 보고 살 수 없고, 흑인이라는 이유로 야간에는 마음대로 외출할 수없으며, 흑인이라는 이유로 실내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고, 흑인이라는 이유로 백인들과 같은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없는 환경에서 연주를 합니다. 비록 콘서트의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지만 그 탁월한 개인적 능력과 자질이 차별받는 흑인이라는 사회적 존재양식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백인사회로부터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흑인 사회로부터는 흑인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남자들로부터는 남자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평생 차별적 대우를 받아야 했던 셜리 박사가 빗속에서 울부짖는 외침은 토니의 가슴뿐 아니라 우리 맘에도 아프게 와 닿습니다. 우리도 이런저런 고정관념으로 타인을 판단하고 타인의 생각을 재단하고 타인의 행동을 강요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용기가 필요하니까요.

 

자기 자신도 이탈리아계 백인으로서 주류 백인사회로부터 차별을 받았을 토니는 셜리 박사라는 타자와의 접촉, 충돌, 소통, 이해를 통해 자신의 고정관념을 벗어던지고 유색인종과의 우정이라는 새로운 선택을 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새로운 언어를 '구사'함으로써 가능했습니다. 그동안 자신의 존재양식을 규정해왔던 '떠벌이'의 언어가 아니라 자신의 솔직한 감정과 느낌을 미려하게 표현할 수 '품격의 언어'로!. 그래서 토니가 새로 배운 그 '품격의 언어'로 쓰인 편지를 받은 토니의 아내는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셜리 박사에게 '편지 쓰는 걸 도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어는 존재의 집입니다.

영화 <그린북> 포스터

오락성: 

영상미: 

작품성:  

완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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