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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Jun 12. 2024

한 표만 소중히 하다가 놓친 것?

한 표가 소중하다는 착각 _02




이 포스터는 대한민국 선거관리의 주무부처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만든 홍보 포스터다. '한 표의 소중함', 이것은 지난 60여 년간 우리 조직이 절대 의심하지 않았던 절대 가치 즉, 정언 명제이다. 따라서 우리 조직의 모든 홍보 전략과 이에 기반해 제작된 모든 홍보포스터는 이 '한 표의 소중함'을 홍보한다. 한 표가 대한민국의 내일을 만들고,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니까. 홍보 포스터뿐만 아니라 우리 조직의 주요 업무 자체가 '한 표의 소중함'을 절체절명의 지상과제로 삼고 있다. 


그래서 외국에 나가있는 재외국민과 재외동포들에게도 '재외 투표'로 투표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내국인이라도 일시적으로 출장이나 학업으로 인해 외국에 나가는 경우에도 외국에서 투표할 수 있도록 '국외 부재자' 투표를 실시한다.  몸이 불편하신 분들이나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섬에서도 투표할 수 있도록 '거소 투표'도 실시한다. 병원, 요양원, 초소, 병영 등 격리되거나 고립된 시설에 거주하는 유권자들도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 원양어선을 타고 멀리 참치 잡이에 나선  분들도 걱정 마시라, 이분들도 팩스로 투표할 수 있도록 '선상 투표'도 있다. 선거일 전 5일부터 전국 어디서나 이틀 간 할 수 있는 '사전 투표'는 기본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시행되는 있는 이 모든 다양한 투표제도는 바로  '한 표의 소중함'을 구현하기 위한 제도인 것이다. 이런 다양한 투표제도를 도입한 우리나라의 선거 시스템은 전 세계적으로 비교해 봐도 대단히 훌륭하다. 



지난 2019년 이후 코로나 시국이 한창이던 때는 격리시설에도 투표소가 설치되어 격리된  코로나  환자들도 투표를 할 수 있었고, 이후 법 개정을 통해 코로나와 유사한 법정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도 투표소에 와서 투표를 할 수 있다. 우리 입법자들은 전염병 예방이나 전염병 확산의 위험보다 '한 표의 소중함'에 더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준비도 예측도 덜  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격리자 투표를 추진하다가 소위 '소쿠리 투표' 사태도 발생하지 않았던가?  이렇듯 '한 표의 소중함'은 절체절명의  지상과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이다, 유권자의 한 표는 무엇보다 소중하다. 모든 유권자의  한 표 한 표가 다 동등하게 소중하다.  그래서  투표소에서 투표한 선거인수와 개표소에서 나온 투표자수가 단 한 표라도 차이가 나면 선관위 직원들은 이를 반드시 규명해야 집에 갈 수 있다. 그래서 종종 개표 절차는 선거일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진다. 유권자들은 댁에서 치맥 하시면서 흥미진진하게 개표방송 시청하시다가 화면에 '당선 확정' 뜨면 잠자리에 드시지만 말이다. 대개 선거일에는 오전 4사부터  출근해서 일러야 다음날 오전 12시쯤 귀가할 수 있다. 이것도 투표자수가 문제없이 일치될 경우에 그렇다. 꼬박 36시간을 수면 없이 일해야 할 때도 종종 있다. 




한 표는 소중하다. 당연한 이야기다.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한 표만 소중히 하다가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한 표를 소중히 하는 것이 저 홍보 포스터처럼  한 표의 무게에 너무 많은 힘을 실은 것은 아닌지 말이다. 한 표의 가치가 모두 동일한 무게로 산정되지 않고  어떤 한 표는 지나치게 많은 무게와 가치를 부여받는 것은 아닌지, 어떤 한 표는 소중히 하면서 다른 많은 표는 오히려 아무 가치도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한 표 혹은 소수표에 의해 대통령 당선인이 달라지고, 국회의원이 달라지고, 교육감과 지방의원이 달라지고, 정당별 당선자수와 정당별 의석수가 달라지면, 앞으로 5년간 혹은 4년간 경제정책이  달라지고 남북관계가 달라진다. 수많은 공공기관의 책임자와 감사, 이사가 달라지고, 대법관과  헌법재판소 등 사법부 수반과 행정부 장관들의 성향이 달라진다.  수많은 정부 산하 기관의 수장이 달라지고, 수많은 정부 산하 위원회, 감사원, 선관위, 검찰청 고위직의 인적 구성이 달라진다. 판사, 검사에서부터 정부 자문위원에 이르기까지 한 표 혹은 적은 표 차이로 달라질 수 있다. 심지어 방송과 언론의 지침과 논조가 달라지고, 프로그램 색채와 진행자가 달라진다. 마땅히 통과되어야 할 법안이 국회 문턱을 통과할 수 없을 수도 있고, 결코 통과되서는  안될 악법이 제정될 수 도 있다.  한 표 혹은 몇몇 표만으로 우리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 구성에 결정적 차이가 생기고 나라의 운명이 크게 뒤바뀐다면 과연 이게 바람직한  일일까? 



우리는 지금까지 한 표의 소중함만 고이 간직하고, 금과옥조처럼  여기다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소중한 한 표를 누군가가 행사해서 이렇게 많은 결정과 변화가 가능해진다면, 그 '소중한 한 표'와는  다른 선택을 한 수많은 표는 너무 무시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일 그 '소중한 한표'가 자신과는 다른 선택을 한 모든 이들의 선택을 뒤집어 버릴 수 있는 한 표라면, 이 한 표는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받은 것은 아닐까?  



대한민국 선관위가 제작한 저  홍보 포스터처럼 저울의 양 쪽에 어떤 표를 올려놓더라도 같은 수의 동일한 표라면 저울은 수평을 이뤄야 하는데, 혹시 우리는 지금 결과적으로 어떤 한 표만 너무 소중히 하다가 이 균형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저울의 왼편 손에는 한 표가, 저울의 오른편 손에는 많은 표가 올려져 있다면 이는 잘 못된 거 아닐까?  이른바 사표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한 표가 다른 모든 표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이는 저울의 균형을 무너뜨린 것이다. 이른바 표의 등가성의 문제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한 표의 소중함만 너무 소중히 여기다가 잊고 있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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