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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Jun 05. 2024

영화  <스윙 보트>와
한표의 소중함(?)

한 표가 소중하다는 착각 _01

왕년의 명배우 케빈 코스트너가 함량 미달의 아빠 역할로 출연한 영화 <스윙 보트>는 정말 한표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영화일까?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미국 뉴멕시코주의 작은 도시 텍시코에서 아빠(버드)와  단 둘이 살고 있는 12살 몰리는 아빠보다 더 성숙해 보인다. 대통령 선거일에 함께 투표소에 가기로 했던 아빠가 급기야 근무태만으로 직장에서 해고 되고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시느라 투표 하지 못한다. 투표소에서 아빠를 기다리던 몰리가 아빠 대신 몰래 투표를 하고 나오는데, 갑자기 정전으로 기표한 투표지가 정상적으로 처리 되지 못한다. 다음날 정부 당국은 미완결된 버드의 표를 10일 안에 재투표할수 있도록 결정한다. 여기서 영화는 재투표가 결정된 버드의 한 표를 제외한 집계결과, 현직 공화당 대통령후보와 경쟁자인 민주당 후보의 득표수가 동수라고 설정한다. 


실제로 선거인단 제도와 간접선거라는 미국 대통령 선거의 독특한 방식 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할수 있다. 왜냐하면 미국은 50개 주별로 배정된 대통령 선거인단이 2차투표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간접 선거제도를 선택하고 있고, 각 주의 선거인단은 하나의 단위로 투표하기 때문이다. 만약, 뉴욕주에 배정된 대통령 선거인단이 10명이고 뉴욕주에서 민주당 후보가 1차 투표에서 승리했다면, 2차 투표에서는 이 뉴욕주 선거인단 10명은 하나의 단위로  모두 민주당 후보에 투표하는 방식이다. 



영화 <스윙 보트>의 한 장면



결국, 재투표하기로 결정된 버드의 단 한표에 따라 미국의 차기 대통령이 결정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쉽게 말해서 몰리의 아빠 버드가  미국의 차기 대통령을 결정할  한 표를 행사할 유일한 권리를 갖게 된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박빙의 승부를 겨루던 양당의  대통령 후보자들은 버드의 한표를  얻기 위해 사활을 건다. 버드의 한마디에 정책이 결정되고, 버드의 한마디로 공약이 바뀐다. 버드의 말 한마디로 민주당 후보는 반이민정책을 천명하고, 공화당 후보는 친환경정책을  내세워 유권자들을 혼동에 빠트린다.  전통적인 기존  정당 정책 노선과는 반대로 민주당은 낙태 반대를, 공화당은 동성결혼 찬성을 주장하기도 한다. 



상황이 이렇게 흐르자 양당 후보자의 정체성은 모호해지고  후보자는 물론 유권자들까지 혼란에 빠진다. 버드의 순간적인 기분과 버드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로 공화당과 민주당이 오랜 전통과 역사 속에서 추진해 온 고유한 정당 정책과 노선이  한순간에 뒤바뀌자 각 정당의 지지자들은 정체성의 위기에 빠진 것이다.  


선거 결과가 버드의 한표로 결정되는 상황이 되자 선거운동 과정은 오직 선거공학만 지배하는 제로 섬 게임이 되고 승자독식의 이전투구판으로 변질된다. 버드의 한표를 얻는 자가 승리자가 되는 승자독식의 선거판에서는 더 이상 오랜 정당 정책이나 이념은 무의미해진 것이다. 버드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각 후보자들은 버드의 취미와 기호를 파악해 맥주를 대접하기도 하고 멋진 공연을 기획하기도 한다. 현직 대통령인 공화당 후보는 버드에게 선물공세를 펴고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원에 초대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술주정뱅이에 무책임한 싱글대디 버드가 미국의 운명을 결정할 단 한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소중한 한표'를 얻는 자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최종 승리자가 되고 모든 권력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나는 서서히 이 영화가 '한 표의 소중함'을 말하는 영화인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버드의 한 표로 미국 대통령이 결정되고 미국의 운명이 달라질 테니 분명 버드의 한표는 소중하다. 그래서 우리 나라 선관위에서도  '대한민국의 미래, 당신의 한표가 바꿉니다', "한표가 후보자의 당락을 결정합니다" 혹은,  한표가 우리나라의 미래를 바꿀수 있습니다" 등등의 캐치프레이즈를 많이 사용한다. 실제 우리나라에서도 한표 차이로 승부가 갈린 적이 종종 있었다. 1995년 제1회 동시지방선거에는 6곳에서 한표가 승부를 갈랐다. 1998년 제2회 동시지방선거에서는 2곳, 2002년 제3회 동시지방선거에서는 총 4곳에서, 4년 뒤 제4회 지방선거에서는 한 곳에서 한 표차 승부가 펼쳐졌다. 심지어 제1회 지방선거에서는 전남 신안 군의원 선거와 경남 통영 시의원 선거 두곳에서 후보자가 동률을 기록해 연장자가 당선인으로 결정된 경우도 있다.


이렇게 지방선거에서는 한표가 정말로 승부를 가르기도 한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아직까지 한 표 차 승부가 기록되진 않았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가장 근소차 승부는 3표차이다. 



그런데, 단 한표로 승부가 갈린다면 그게 바람직한 일일까? 단 한표로 선거의 승패가 결정나고, 당선자가 결정되고, 국가의 미래가 바뀌는 게 과연 바람직하고 합당한 일일까? 영화 <스윙보트>에서처럼 버드의 '소중한 단 한 표'가 당선자 결정을 좌우한다면 수많은 다른 유권자들의 표는 무의미한 거 아닌가? 버드의 '소중한 한 표'로 미국 대통령이 결정된다면 버드의 한 표는 너무 많은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닌가? 버드의 단 한 표가 어느 당 후보로 향하느냐에 따라 미국의 최고 권력자가 결정되는 선거 방식이 과연 민주적인 선거방식인가? 버드의 '소중한 한 표'는 너무 '소중하게' 평가  받는 것은 아닌가? 


또 애초부터 이 영화에 나온 버드의  '소중한 한표'는 사실 버드의 표도 아니지 않았던가? 투표소에서 아빠와 만나기로 한 몰리는 아빠가 술에 만취해 쓰러져 나타나지 않자 몰래 투표소에 들어가 아빠 대신 버드의 '소중한 한 표'를 행사했던 것이다. 몰리는 사실 투표사무원의 관리가 소홀한 틈을 타 아빠의 서명을 위조해 이른바 '사위 투표', '대리 투표'를 한 것이고 이는 엄연히 심각한 범죄행위이다. 또 영화를 보면, 몰리 본인의 잘못으로 전기 코드가 빠지면서 투표장치의 오류가 난 것이고  이럴 경우  해당 투표지는 선거인 본인 책임으로 훼손된 것으로  간주해 무효처리가 된다. 물론 영화적 구성과 극적 효과를 배가하기 위해 이런 인위적이고 다소  위법적인 설정들을 가미한 것이기에 이런 '옥의 티'는 눈감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한 표의 소중함'을 강조하기 위해 '대리 투표'한 한 표로 미국의 대통령 선거가 결정된다는 설정은 많이 어색하다.



극적 효과를 위한 이런 인위적 설정은 차치하더라도 이 영화는 오히려 '한 표의 소중함', 소중한 한표의 가치를 일깨우는 영화라기 보다 '한 표의 소중함'만을 강조 할 때 생기는 문제점을 그리는 것 같다. 미국 대통령 선거의 당락을 가른 버드의 한 표는 오히려 버드와는 다른 선택을 한 혹은 다른 선택을 한 미국 대다수 유권자들의 한 표를 무의하게 만든다. 이것이 바로 이른 바 '사표'의 문제다. 사표의 문제는 동등한 가치를 갖는 모든 선거인의 동등한 한표를 결국 다르게 평가하는 표의 등가성 문제,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유권자의  의사와 대의기구의 구성이 일치하지 않는 비례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또 버드의 한 표만 선거의 당락을 가를 '소중한 한표'로 설정하면서 선거운동 과정은 왜곡된다. 각 정당은 고유한 정책 대결과 자신들의 정책에 기반한 공약을 유권자들에게 제시하지 못하고 오직 버드의 한표를 얻기 위해 골몰한다. 모든 선거과정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권력정치의 과정으로만 변질되고 선거과정에서 의제설정이나 공약 개발을 요원한 일이 된다. 영화에서 보여주 듯이 선거가 오직 승자만이 모든 것을 얻게 되는 승자독식의 제로섬 게임이 되면 후보자는 선거공학적으로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려고 한다. 극단적으로 버드에게 향응과 기부행위를 하고 이는 유권자의 표를 매수하는 행위에 다름없다. 선거운동이 과열되고 혼탁해진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정당이 중심에 서지 못하니 공약과 정책은 없고 한 인물 중심의 선거가 되고, 결국 상대를 헐뜯는 상호 비방과 허위사실 유포 등 네거티브 선거가 판을 친다. 


영화에서는 극적 효과를 배가하기 위해 버드의 한 표를 미국 대통령을 결정하는 '소중한 한표'로 설정하여

버드와 다른 선택을  한 유권자들의  모든  표는 사표가 되는 극단적인 경우를 설정했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니까' 현실에서 이런 상황이 발생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러나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더라도 대량 사표가 발생하는 경우는 표의 등가성, 비례성, 대표성, 정당성의 문제를 야기한다. 이런 표의 등가성의 심각한 왜곡은 결국 대의제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   최근 치러진 22대 총선에서도  이런  경향은 더 심화했다. 사표의 대량 발생과 이로 인한 선거제도와 대의제의 위기는 그러므로 이제 극복해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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