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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로츠뎀 Mar 13. 2019

'진정한' 사회주의를 위한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 판사의 책 <개인주의자 선언>

문유석의 <개인주의자 선언>을 읽었다.  '판사 문유석의 일상 유감'이라는 부제가 붙은 279페이지짜리 에세이집이다. 부제처럼 현직 부장판사이자 '집단주의 성향이 강한 한국사회에서 투사가 되기는 싫어 연기자'라도 되어야 했던 그가 일상에서 느끼는 유감을 일간신문에 기고한 글을 모은 칼럼집이다. 내가 처음 읽은 그의 글은 2017년 새해 첫날 그가 기고한 '전국의 부장님들께 감히 드리는 글'이었다.  그 일부를 여기에 옮겨본다면,


‘내가 누군 줄 알아’ 하지 마라. 자아는 스스로 탐구해라. ‘우리 때는 말이야’ 하지 마라. 당신 때였으니까 그 학점 그 스펙으로 취업한 거다. 정초부터 가혹한 소리 한다고 투덜대지 마라. 아프니까 갱년기다. 무엇보다 아직 아무것도 망칠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라. 하려면 이미 뭔가를 망치고 있는 이들에게 해라. 꼰대질은, 꼰대들에게


우리 시대 젊은이들에게 기성세대가 가하는 불합리한 꼰대질을 특유의 경쾌하고 리듬감 있는 필치로 일갈하는 글이었다. 놀라웠고, 재미있고, 통쾌했고, 정확했다. 이런 글을 현직 판사가?  이런 생각을 하는 현직 부장판사도 있다니, 세상은 분명 다양해지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래서 샀다, 잘 사지 않는 에세이집을. 그리고 책날개에 적힌 저자 약력을 보고 다시 한번 놀랐다. 그가 어느 공중파 방송의 드라마로도 제작된 바 있는 <미스 함무라비>의 원저자라니!

<미스함무라비, 개인주의자선언, 공산당선언 책표지>

<개인주의자 선언>이라는 제목은 공산주의 사상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집필한 그 유명했던(?)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에서 가져온 것처럼 보인다. 88 학번이라는 그는 '사회과학의 전성시대'이던 8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녔을 테고 분명 <공산당 선언>을 한번쯤은 손에 쥐었을 것이다. <공산당 선언>이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로 끝난다면, 이 책은 '만국의 개인주의자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로 시작한다. <공산당 선언>이 만국의 노동자들이 "잃을 것이라곤 족쇄뿐이고 그들이 얻을 것은 전 세계"라고 웅변한다면, <개인주의자 선언>은 개인주의자들이 잃을 것은 "무난한 사람이라는 평판이지만, 얻을 것은 자유와 행복이다."라고 외친다. 분명 이 책은 세상과 '전면적'인 관계는 맺고 싶지는 않은 개인주의자 문유석의 개인주의 선언문이다.


그는 우리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드는 굴레가 전근대적인 집단주의 문화이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무엇보다 사회 교과서나 법학서적에나 등장하는 근대적 의미의 합리적 개인주이라고 생각한다. 로크, 밀, 몽테스키외, 루소 등 서구 시민사회 사상가들이 주장한 합리적 개인주의를 수입 완제품으로 들여왔을 뿐 그 속에 녹아있는 개인, 인권, 자유, 평등의 이념을 내면화시키지 못한 우리는 남들 눈에 비치는 내 모습에 집착하는, 개인의 자존감보다 집단 내에서 개인의 평가가 더 중요한 집단주의 문화에 매몰되어 있다.

<자유론, 공리주의, 인간불평등 기원론 책표지>

 집단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는 다양한 개인적 삶에 대한 존중보다는 획일적이고 서열화된 수직적 가치관이 사회의 모든 분야를 지배한다. 학벌, 직급, 성적, 평수, 외모, 차종 등등 몇 개의 외면적, 물질적 지표들로 인간의 삶의 모든 국면을 재단하는 무한 경쟁의 사회에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문유석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우리를 더욱더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전근대적 집단주의에서 비롯한 수직적 가치관이라고 지적한다. 자신의 고유한 자존감보다는 남들 눈에 비치는 내 모습에 집착하며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다는 욕망이 지배적인 문화 속에서 성형중독, 사교육 중독, 학력 위조, 호화 결혼식 등등 강박적 인정투쟁이 벌어진다고. 타인과의 비교에 대한 집착이 무한경쟁을 낳는다고.


그래서 '훌륭한 사람보다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은 문유석은 개인이 먼저 주체로 서서 타인과의 경계를 인식하고 이를 존중하며, 집단 논리에 휘둘리지 않는 '합리적 개인주의자'가 될 것을 호소하는 <개인주의자 선언>을 발표하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합리적 개인주의'는 무정부주의도 아니고  '세상과 일체의 관계를 맺고 싶지 않은 절대적 은둔주의가 아니다. 그가 말하는 합리적 개인주의는 '공동체에 대한 배려, 사회적 연대와 공존한다. 자신의 자유를 존중받으려면 타인의 자유도 존중해야 하기 때문이다. 톨레랑스, 즉 차이에 대한 용인, 소수자 보호, 다양성의 존중'이 바탕이 된 사회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 주변의 힘들어하는 이들을  발견하고, 세상의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기를 멈추지 않는 개인주이다. 그래서 그가 꿈꾸는 사회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외계인 카페처럼 다른 별에서 온 사람들과 평화롭게 어울리는, 초록색 외계인들이 내 맘에 안 들더라도 어차피 잠시 머물려 즐겁게 보내야 하는 술집 같은 곳이다. 개인주의자 문유석이 바라는 사회는 다소 불편한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다른 입장의 타인들과 타협하고 연대하고 사회의 공정한 룰에 대해 함께 고민하는 합리적 개인주의자들의 사회이다. 그래서일까 그의 <개인주의자 선언>은 내게는 '진정한' 사회주의자 선언과 다를 바 없었다. 문유석의 <개인주의자 선언>에 깔린 휴머니즘은 내게 1848년 맑스와 엥겔스가 그들의 <코뮤니스트 매니페스토>를 써 내려가던 본래의 마음과 다를 바 없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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