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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에 대한 단상

설거지란 무엇인가

by 몽쉘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엔, 맑고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글쓰기 좋은 날이다.

내 마음을 비추는 거울로 삼는다. 빗방울처럼 투명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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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노력한 만큼 결과로 이어지는 일은 많지 않다.

그런 면에서 설거지는 그 자체로 깨끗하고 투명한 일이다.


02 그러니 설거지는 얼마나 신성한 일인가.

그 일을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 '엄마'라는 사람은 신일 것이고.



"엄마는 '존경합니다'라는 말 밖에는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 유 퀴즈 온 더 블럭 52화 '기억을 걷는 시간'



"의사보다 나아. 엄마들이 의사보다 훨씬 나아.

엄마들은 다 존경해."


-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 10화




03 설거지에도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순간들이 있는데

이를테면 거품이 풍성하게 날 때, 그 거품을 씻어낼 때 그릇에서 만져지는 뽀득함이 느껴질 때이다.


04 마음에도 설거지가 필요하다.

설거지를 제때 하지 않으면 냄새가 나고 벌레가 꼬이듯

마음의 설거지도 제때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서 좋지 않은 분위기가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05 요즘 내 마음을 설거지하는 방법은 아무래도 산책이다.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길가에 핀 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발이 닿는 대로 걷다 보면

생각의 거품이 풍성하게 일었다가 마음이 뽀득해진다.


06 제철 과일, 나물을 많이 먹는 것도 마음을 깨끗이 청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자연에서 온 음식들은 순해서 잘 지워지는 흔적을 남긴다.


07 설거지를 하며 이런 생각들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설거지를 자주 하지 않기 때문인데

곧 철이 들려면 아직 멀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08 그러니 이런 생각들은 또 거품에 불과하다.

설거지를 하며 몽글몽글 인 생각의 거품을, 글을 쓰며 말끔히 씻어낸다.




창문엔 빗방울이, 마음엔 물방울이 맺혔다.

똑 똑 하고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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