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빨래라는 건
엄마는 점심에 입맛이 없다 했다. 밥을 두 숟가락쯤 먹다 이내 반찬 뚜껑을 덮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요즘 '엄마'라는 견고하게만 보였던 성이 곧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느껴질 듯 말듯한 살랑이는 바람에, 어느 날 갑자기 툭 하고 쓰러질 것만 같았다.
"난 좀 웃겼던 게
비행 마치고 어느 날 집에 가는데
어느 집 베란다에서 어떤 여자가 빨래를 툭툭 털면서 널고 있는 거야.
너무 평온해 보이더라고..
오늘 날씨가 이렇게 좋았구나,
그때부터 하늘도 좀 보이고
나는 왜 이러고 사나,
왜 하루하루를 미친년처럼 사나..
그날로 관뒀어."
몇 년 전, 드라마에서 저 장면을 본 이후로 빨래가 널려있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뭉클해진다. 누군가에게는 지겹고 귀찮은 집안일에 불과한 '빨래'라는 것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빨래할 여유조차 없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구나, 빨래가 뭐길래.
엄마도 문득 이런 생각이 들 것만 같았다. 내가 본 엄마는 한 시도 쉬지 않는 사람이었다. 가만히 있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일어나서 밥하고, 운동하고, 일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방 닦고, 틈틈이 식물도 들여다 보고...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며 온다는 말이 잊히지 않는다. 집에 가서 쉴 생각을 하며 퇴근하는 것이 보통이 아니던가. 하루쯤 쉬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매일 끊임없이 몸을 움직였다.
엄마가 모든 걸 내려놓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볼 생각을 하니 두려워졌다. 겨우 반나절 만에 싱크대를 가득 채운 그릇들을 설거지하고 베란다에 널린 빨래를 걷어 갰다. 엄마의 머릿속에 쓴 할 일들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길 바라며, 엄마만은 무너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무너지는 게 아니라 원래 엄마에게 있었던 자유를 되찾는 것뿐인데. 결국 빨래를 개는 일도 나를 위한 일이었다.
지난 글의 설거지에 이어 이번엔 빨래까지. 집안일은 몸을 움직이는 것이고, 몸을 움직이면 잡념이 없어진다고 했는데 어째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인지 모르겠다. 여기저기 묵은 생각들이 때처럼 밀려 나와 글에 흘려보낸다. '빨래' 하니 얼마 전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 <방구석 콘서트> 편에서 봤던 뮤지컬 '빨래'가 떠올랐다. 빨래를 가사로 쓴 노래가 감동적이었다.
빨래가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것처럼
인생도 바람에 맡기는 거야
시간이 흘러 흘러 빨래가 마르는 것처럼
슬픈 니 눈물도 마를 거야
자, 힘을 내!
슬픔도 억울함도 같이 녹여서 빠는 거야
손으로 문지르고 발로 밟다 보면 힘이 생기지
깨끗해지고 잘 말라 기분 좋은 나를 걸치고
하고 싶은 말 다시 한번 하는 거야
빨래가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것처럼
인생도 바람에 맡기는 거야
깨끗해지고 잘 말라서 기분 좋은 나를 걸치고
하고 싶은 일 하는 거야
- 뮤지컬 빨래(2019) OST 앨범 중 '빨래'
서울살이 여러 해, 당신의 꿈 아직 그대론 가요?
나의 꿈 닳아서 지워진 지 오래
잃어버린 꿈 어디 어느 방에 두고 왔나요?
빨래처럼 흔들리다 떨어질 우리의 일상이지만
당신의 젖은 마음
빨랫줄에 널어요
바람이 우릴 말려 줄 거예요
당신의 아픈 마음
꾹 짜서 널어요
바람이 우릴 말려 줄 거예요
당신의 아픈 마음
털털 털어서 널어요
우리가 말려 줄게요
- 뮤지컬 빨래(2019) OST 앨범 중 '서울살이 몇 핸가요?'
이제 빨래를 보면 희망을 가질 수도 있게 되었다. 신기하게도 설거지와 빨래는 우리가 사는 것과 꼭 닮아 있었다. 부지런히 씻고 너는 일은 비단 그릇과 옷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 꼭 필요한 일이었다. 부지런히 집안일을 하면 그것을 잊지 않고 살 수 있을지도 몰라. 사는 동안 엄마를 따라잡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까,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수행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