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스며들다.

1권 시작의 온도.

by 슈우

프롤로그. 마음의 기류

1

류는 고요한 공간에 익숙했다. 적막한 밤, 멈춘 듯한 공기, 가끔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 그리고 가슴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감정의 미세한 파동들. 그는 평소처럼 커피를 내렸다. 끓는 물이 분쇄된 원두 위로 천천히 스며들며 퍼지는 향, 잔잔한 소음 속에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온기. 그는 매일 반복하는 이 작은 행위를 바라보며 그 속에서 자신을 찾았다.

이날도 그랬다. 커피가 천천히 내려오는 동안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빛 속에서 한낮의 공기가 미묘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가 찾아올까. 어떤 감정이 스며들어 이 하루를 물들일까.

그의 일상은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에 가까웠다. 무언가를 쟁취하려 하기보다,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떠오르는 감정과 생각을 감지하고, 그것이 머무는 방식대로 하루를 채워 나갔다.

그러다 문득, 며칠 전 페이스북 메시지가 떠올랐다.

"오사카에도 이런 바람이 불어요. 류 씨가 언젠가 느꼈던 그 바람처럼요."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와타나베 모모코. ‘예전에 알고 있었지만 친하지 않았던 친구’라는 표현이 가장 적절한 관계였다. 몇 년 전 출장길에서 스쳐 지나간 만남, 그리고 거의 잊고 있던 존재. 그러나 페이스북 알고리즘이 다시 연결해 준 관계 속에서, 대화는 이상할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뜬금없는 메시지였지만, 그 문장은 마치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있던 것처럼 깊숙이 스며들었다.

2

모모코. 이름만으로도 어떤 감각이 떠올랐다. 어딘가 부드럽고, 따뜻하고, 가볍게 스치는 느낌. 그녀의 SNS에는 종종 일상의 흔적이 올라왔다. 병원 창밖으로 보이는 벚꽃, 퇴근길에 들른 작은 카페, 지하철 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 평범한 듯하지만, 그녀가 공유하는 사진들은 감각적으로 다가왔다.

류는 그 사진들에 ‘좋아요’를 누르기 시작했다. 때로는 짧은 댓글도 남겼다.

"이 거리, 영화 같네요." "빛이 참 좋네요."

그녀는 고맙다는 이모티콘과 함께 짧은 문장을 남겼다. 그리고 며칠 뒤, 메시지가 왔다.

"류 씨, 예전에 오사카 왔을 때 기억나요? 저는 아직도 그때 얘기했던 '공기의 결'에 대해 생각해요."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류는 확실히 무언가가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공기의 결’. 오사카 출장 중 술자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꺼냈던 말이었다. 일본의 공기는 확실히 다르다—습도, 온도, 거리에서 느껴지는 체온 같은 감각. 대부분의 사람들은 웃으며 넘겨버린 말이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기억 하나가 공간을 다시금 물들였다.

3

그 이후로 그는 모모코를 자주 떠올렸다. 이유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녀가 특별해서도, 아름다워서도 아니었다.

오히려 ‘말의 틈’이 남았다.

모모코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감각이 섬세한 사람이었다. 류에게 그것은 귀한 감각이었다.

그는 서울의 카페에서 결혼정보회사 미팅을 가졌다. 적절한 조건, 나쁘지 않은 분위기. 하지만, 감정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커피잔을 들고 있는 자신의 손끝만이 유독 도드라져 보였고, 대화는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정지되어 있었다.

그날 밤, 그는 모모코의 사진 한 장에 다시 ‘좋아요’를 눌렀다.

사진 속에는 봄비가 내리는 거리. 흐릿한 불빛, 젖은 도로, 그리고 사람들의 발걸음이 조용히 번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또 메시지가 왔다.

"오늘 하루는 어땠어요?"

그 짧은 문장 하나에, 그는 마치 한참을 기다려온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4

그는 언젠가부터 모모코와의 대화를 혼잣말처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은 단순하지만 온전했다. 단어 하나하나에 감각이 깃들어 있었다.

"모모코 씨는 상대의 말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다." "나에게 필요했던 건, 말보다 마음의 결을 알아차려 주는 눈빛이었다."

그는 그녀가 한국을 방문한다고 했을 때, 처음으로 진심으로 떨렸다. 누군가를 만나는 일에서 이렇게까지 설렘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동시에, 이 감정이 현실에서 어떤 모양을 가질 수 있을지 고민했다. 서로의 언어, 삶의 리듬, 거리가 다르다. 그러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나를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는가’였다.

그는 화면을 닫고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창문 너머를 스치고 있었다. 마치 오사카의 바람처럼, 온도와 습도, 그리고 약간의 망설임이 섞인 바람.

‘그녀의 마음은 지금, 어디쯤일까.’

류는 그렇게 조용히, 그녀의 마음이 건너오는 기류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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