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스며들다.

제5장. 가까운 거리, 먼 관계

by 슈우


1. 관계의 정의, 혹은 정의되지 않은 관계

서울에서의 며칠이 지나고, 모모코는 류와 함께 있는 시간이 익숙해지고 있었다.


함께 걷는 거리, 나누는 말, 카페에서 머무는 순간들까지—


처음엔 조금 어색했던 공기조차 당연한 온도로 옷처럼 몸에 붙었다.


하지만 가까워진 거리만큼, 알 수 없는 감정의 간극도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날, 홍대의 작은 레코드 숍에서 모모코는 조심스럽게 류에게 물었다.


"당신은 나와의 관계를 뭐라고 생각해요?"


류는 한참을 고민했다. 그의 손이 진열된 LP 커버 위를 천천히 훑었다.


그리고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말로 붙잡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말은 모모코의 마음을 서늘하게 했다.


"말로 붙잡지 않는다는 건, 말로 책임지지 않겠다는 뜻일까?" "아니면, 언어로 담아내기엔 아직 너무 불완전하다는 의미일까?"


그녀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이전보다 조금 더 많은 침묵이 흘렀다.


2. 혼자의 시간, 마음의 거리

모모코는 서울에서의 남은 시간 동안, 일부러 혼자 있는 순간을 늘리기 시작했다.


익숙하지 않은 도시에서 혼자라는 사실은 더 명확하게 느껴졌다. 거리를 걸을 때마다, 그녀는 자신이 외국인이라는 것을 자각했고,


류가 곁에 없을 때면 그 감각은 더욱 짙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속에 스며드는 감정을 조용히 글로 옮기기 시작했다.


일기처럼, 기록처럼.


그러다 한 문장을 한국어로 번역해 메시지로 보냈다.


"나는 가까이 있고 싶지만, 당신은 먼 곳에 머무는 것 같아요."


류는 그날 밤 늦게 답장을 보냈다.


"내가 멀어지는 게 아니라, 조심스러워지는 거예요."


그 말은 이해가 되면서도, 서운함을 지우지 못했다.


모모코는 자꾸만 ‘확신’을 원하게 되는 자신이 조급한 건 아닐까 스스로를 타이르면서도,


마음 어딘가가 서늘하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3. 서울숲에서, 움직이지 않는 감정

다음 날, 두 사람은 서울숲을 걸었다.


날씨는 맑았고, 하늘은 높았다.


하지만 모모코는 자꾸만 류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무슨 말을 할까." "어떤 감정을 말하지 않고 숨기고 있을까."


그녀는 그런 것들에 더 민감해졌다.


류는 작은 정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입을 열었다.


"나는 관계를 천천히 쌓고 싶어요." "서두르지 않고, 부서지지 않게."


모모코는 그 말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그냥 그 순간,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이 흘렀고, 나무 사이로 햇살이 내려앉았다.


그 풍경은 고요했지만, 그녀의 마음속은 잔잔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천천히를 이해하고 싶다. "하지만, 멈춰있는 건 아닐까?"


4. 감정을 내주는 일, 두려움과 희망

류는 모모코에게 조금씩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어릴 적 기억, 가족과의 거리, 그리고 오랜 시간 독립적으로 살아온 일상.


그는 늘 말이 적었지만, 그날은 평소보다 더 많은 감정을 내보였다.


"나는 누군가에게 감정을 완전히 내주는 게 무서웠어요." "책임이 생기고, 그게 무너질까 봐."


그 말에, 모모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다. 그리고 동시에, 슬퍼졌다.


"나는 누군가에게 감정을 완전히 내주고 싶은 사람이니까." "그것이 누군가에겐 두려움이고, 나에게는 희망이라면, 그 간극을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나는요?" "나는 당신에게 어떤 사람이에요?"


류는 대답을 망설였다.


그의 손끝이 찻잔을 천천히 감싸며, 잠시 생각을 머물렀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오래 보고 싶은 사람이에요." "지금의 나로는 아직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사람."


모모코는 그 말을 듣고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웃음엔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얹혀 있었다.


가까워지는 마음. 하지만 여전히 정의되지 않은 관계.


가까운 거리, 먼 감정. 그것이 지금의 그들이었다.


5. 마지막 날, 다음을 기다리는 마음

서울에서의 마지막 날.


모모코는 류와 함께 종로의 오래된 찻집에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을 보며 조용히 차를 마셨다.


말은 적었지만, 감정은 오히려 더 풍성했다.


"나는요, 다시 올게요." "이 도시도, 당신도 아직 다 알지 못했어요."


그녀의 말에, 류는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낮게 말했다.


"기다릴게요." "조금 더 용기 내볼게요." "다음엔… 조금 더 가까운 거리가 되도록."


모모코는 그 말을 오래 곱씹었다.


공항으로 향하는 길, 창밖의 서울 풍경이 빠르게 뒤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녀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조용히 속삭였다.


"먼 관계를, 가까운 마음으로 바꾸는 법." "우리는 지금, 그걸 배우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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