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스며들다.

제9장. 변화의 징후

by 슈우


1. 익숙한 공간, 낯선 감정

초여름의 서울은 점점 더 후덥지근해지고 있었다.


류는 최근 들어 업무가 늘어나면서, 일과 사랑의 균형을 더 자주 의식하게 되었다.


부산 발령이 현실화되는 가운데, 상사의 분위기는 이미 그를 ‘부산 팀’으로 확정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점심시간, 류는 모모코와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대화였지만, 류는 모모코의 말끝에 흐르는 미묘한 침묵을 느꼈다.


그녀는 피곤해 보였고, 어딘가 무기력했다.


일본의 여름도 만만치 않지만, 그녀의 피로는 단순히 날씨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괜찮아요? 요즘 무리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돼요."


류의 말에, 모모코는 한참을 뜸 들이다가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요. 그냥... 생각이 조금 많아서요."


그 순간, 류는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대화 속에서 피어오르는 작은 침묵의 결, 그것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2. 감정의 속도, 맞춰가는 노력

모모코의 회사에서도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지난달, 그녀는 팀 내부 구조 개편과 함께 리더 후보군에 올랐다.


기회였지만, 동시에 그녀에게는 부담이었다.


지금보다 더 바빠지고, 더 많은 책임을 지게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한국과 일본이라는 물리적 거리만큼, 시간의 밀도도 점점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류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회의에 시달렸고, 모모코 역시 늦게 퇴근해 지친 얼굴로 화상 전화를 받는 일이 늘었다.


그들의 대화는 여전히 따뜻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보고 싶다’는 말이 줄어들었다.


그 대신 ‘잘 지내?’라는 말이 늘었고, 때때로 메시지는 단답형으로 마무리되었다.


감정이 식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키기 위해 애쓰는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감정은 애씀만으로는 유지되지 않는다는 걸 두 사람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서로에게 시간을 내고 싶었지만, 그 시간 자체가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3. 충동과 현실, 서로를 위한 선택

주말, 류는 충동적으로 비행기 티켓을 검색했다.


오사카행, 이번 주 금요일 저녁 출발.


그는 구매 직전까지 갔다가, 결국 브라우저를 닫았다.


마음은 가고 싶었지만, 현실은 허락하지 않았다.


모모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오면 얼마나 기쁠지 알면서도, 그가 무리하길 원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짧은 음성 메시지를 보냈다.


"보고 싶다고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보고 싶어요. 당신을."


류는 그 음성을 들으며 말없이 이어폰을 꽂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흐리던 구름이 살짝 걷히며, 미세한 햇살이 빌딩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 순간, 그는 모모코가 곁에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4. 변화 속에서 지켜낸 감정

그 무렵, 두 사람의 공통된 습관이 생겼다.


매일 자기 전, 각자의 하루를 다섯 문장으로 요약해 보내는 것.


간단해 보이지만, 이 다섯 문장은


그들의 하루와 마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오늘은 커피를 세 잔이나 마셨어요." "회의가 길어져서 점심은 삼각김밥으로 때웠어요." "당신이 말했던 그 음악, 오늘 들었는데 좋았어요." "생각보다 지치지 않았어요." "당신을 생각한 시간이 많았어요."


그 다섯 문장은 ‘보고 싶다’는 말보다 더 진한 그리움이었고,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오래 남는 감정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리듬을 존중하면서,


멀어지지 않기 위해 부드럽고 조용한 노력을 이어갔다.


그 변화는 소리 없이 진행됐고, 그 징후는 일상의 틈마다 스며들었다.


5. 흔들림 속에서 찾아낸 다짐

7월이 시작되자, 류의 부산 발령이 확정되었다.


그는 모모코에게 사실을 알리며, 전보다 더 자주 대화를 하자고 약속했다.


모모코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산이든 서울이든, 당신은 당신이니까요." "나는 괜찮아요."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조용했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흔들리는 감정이 있다는 걸,


류는 그제야 알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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