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스며들다.

10장. 다시 맞닿는 시간

by 슈우


1

류가 부산에 도착한 첫날, 하늘은 장마철답게 짙은 회색이었다. 서울에서의 분주함과는 다른 공기, 바다 냄새가 섞인 습기가 낯설었다. 그는 가벼운 짐을 들고 임시 거처로 향했다. 바닥엔 아직 포장도 뜯지 않은 가구들이 놓여 있었고, 냉장고는 비어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공백은, 대화 끝마다 화면 너머로 미소 지어주던 모모코의 얼굴이었다.


“잘 도착했어요. 생각보다 더 조용하네요. 다음 통화 때, 바다 보여줄게요.”


그는 그렇게 메시지를 남겼다. 곧 모모코의 답장이 도착했다.


“바다라니! 드디어 영상통화로 여행하네요. 기대할게요 :)”


그 웃음 이모티콘 뒤에 감춰진 감정들을, 류는 마음으로 읽었다.


2

부산에서의 생활은 단조로우면서도 새로운 감각으로 류를 자극했다. 아침엔 평소보다 조금 이른 출근길, 점심은 회사를 중심으로 구성된 단출한 메뉴들, 그리고 저녁엔 모모코와의 정해진 통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그는 정해진 약속에 점점 더 많은 감정을 실었다.


모모코 역시 새로운 리더 역할에 적응하느라 바빴지만, 그 바쁨 속에서도 류와의 약속을 지켰다. 두 사람은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서로의 시간을 미리 예측하고 이해했다. 대화는 길지 않아도, 깊었다. 감정은 격렬하지 않아도, 진심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모코가 조심스럽게 꺼낸 말이 있었다.


“8월 중순쯤… 한국에 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회사 휴가 일정이 조정되면, 3일쯤은 여유가 생길지도.”


그 말에 류는 숨을 삼키며 되물었다.


“정말이에요?”


“응.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나도 너무 보고 싶어서. 한 걸음쯤은 먼저 내디뎌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그 한 마디는 긴 여름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단 하나의 문장이 되었다.


3

8월의 시작과 함께, 두 사람의 메시지는 점점 더 구체적인 ‘계획’으로 바뀌었다. 만날 장소, 먹고 싶은 음식, 함께 보고 싶은 풍경들. 모모코는 오랜만에 여권을 꺼냈고, 류는 휴가일정을 최대한 맞추기 위해 동료들과 조율을 시작했다.


“바다 근처에 작은 카페가 있어요. 파도가 보이고, 음악도 조용하고.”


“좋다… 그런 데서 하루 종일 있어도 좋아요. 말없이 커피만 마시면서.”


기대가 일정에 겹겹이 쌓이자, 서로의 목소리에서도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그리움이 고조되면, 말은 더 조용해지는 법이었다. 너무 보고 싶으면, 말보다 숨이 먼저 멎는다.


4

마침내, 모모코의 출국일이 정해졌다. 8월 15일, 부산 김해공항 도착. 류는 공항 근처 작은 호텔에 방을 잡고, 그녀가 좋아할 만한 식당과 카페 리스트를 정리했다. 미리 휴대폰 요금도 국제 로밍으로 전환해두었다. 마치 중요한 손님을 맞이하듯, 혹은 오래된 가족을 기다리듯.


비행기 착륙 시간에 맞춰 도착한 공항. 도착 게이트의 유리문 너머로, 그녀가 보였다.


하얀 린넨 셔츠, 단정한 슬랙스, 여행용 캐리어를 끌며, 조금은 긴장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는 모습. 그리고 그 순간, 눈이 마주쳤다. 몇 초간 아무 말도 없이. 그리고 둘 다, 웃었다.


모모코가 먼저 걸어왔다. 류는 그녀 앞에서 반걸음 정도 멈췄다.


“왔네요.”


“응. 왔어요.”


그 말과 함께, 처음으로 아무 망설임 없이 그녀를 안았다.

둘 사이를 가로막던 시간, 거리, 언어, 모든 것이 그 포옹 안에서 사라지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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