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각자의 자리, 같은 마음
류가 서울로 돌아간 날, 모모코는 그의 흔적이 집안 곳곳에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식탁 위엔 그가 마신 찻잔이 그대로 남아 있었고, 현관 근처엔 그가 남긴 향이 희미하게 맴돌았다.
그녀는 침묵 속에서 그와 함께 있었던 순간을 곱씹었다.
그들은 분명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고, 함께 같은 공간을 공유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선명해진 건, ‘함께 있지 않은 시간’이 다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핸드폰을 열었다. 류에게서 도착한 메시지 하나.
"잘 도착했어요. 오사카에서의 시간이 너무 좋았어요."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답장을 적었다.
"여기엔 당신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어요." "그게 좋은 건지, 조금 외로운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어요."
서울의 류는 복잡한 도심 한가운데서도 오사카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바쁜 일정 틈마다, 문득 그녀와 함께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지하철에서 그녀의 메시지를 읽었고, 카페에서 그녀가 좋아하던 향을 떠올렸다.
그러나 동시에, 현실의 벽도 뚜렷해지고 있었다.
거리, 언어, 문화, 그리고 삶의 궤적.
그들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각자의 속도로 살아가고 있었다.
류는 그 사실을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감정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는 조용히 휴대폰을 들었다. 모모코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서울은 생각보다 차갑네요. 당신이 보고 싶어요."
잠시 후, 도착한 답장.
"여기는 당신이 남긴 따뜻함이 아직 남아 있어요." "그러니까, 나도 당신이 보고 싶어요."
모모코는 친구들과의 모임 자리에서 류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일부러 숨긴 것은 아니었지만, 그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애매했다.
‘남자친구’라는 단어는 아직 낯설었고,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은 너무 가볍게 느껴졌다.
그녀는 그저, 그의 존재가 일상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만을 자각했다.
문득 거리를 걷다 류가 좋아할 것 같은 카페를 발견하면 사진을 찍었고, 한국 뉴스에서 작은 사건이 나오면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검색을 했다.
‘사랑’이란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그녀는 그를 마음 한가운데 두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녀는 메시지를 열었다. 류에게 사진 한 장을 보냈다.
"여기, 당신이 좋아할 것 같은 카페." "언젠가 같이 오면 좋겠어요."
잠시 후, 도착한 답장.
"정말 좋네요. 언제든 갈게요." "그러니까, 기다려 주세요."
어느 날 밤, 류는 평소보다 이른 시각에 모모코에게 전화를 걸었다.
화면을 통해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모모코는 그가 뭔가를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무슨 일 있었어요?"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류는 조용히 숨을 내쉬고 말했다.
"오늘, 회사에서 지방 발령 이야기가 나왔어요." "아마 6개월 정도 부산으로 가야 할 수도 있어요."
모모코는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일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걸 마음 한쪽에서 알고 있었다.
"괜찮아요."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게 당신의 삶이라면, 나도 그 안에 포함되고 싶어요." "어디에 있든, 마음은 같이 있으니까."
그 말을 들은 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포함되고 싶다’는 말.
그것은 그 어떤 고백보다도 강한 감정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마워요. 정말로."
그날 이후, 두 사람은 이전보다 더 자주 대화를 나눴다.
같은 시간에 식사하거나, 함께 영화를 틀고 각자의 공간에서 시청하는 작은 약속들이 생겼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그 시간 속에서 작은 습관들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모모코는 카페에서 류에게 쓴 편지를 메일로 보내곤 했다.
류는 매일 그 편지를 인쇄해 노트에 붙여두었다.
손글씨는 활자보다 따뜻했고, 종이의 질감은 스마트폰 화면보다 생생했다.
그들은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의 마음을 품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멀리 있어도, 외롭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의 일상에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으로도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