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사이 캣맘이라 불린 지 10년 하고도 몇 년이 훌쩍 지났다.
나를 보아온 몇몇 지인들은 결코 끈기 있는 성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꽤 오래 길 고양이 밥을 주는 것을 보고 조용히 격려와 연민을 보내온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늘 언제쯤 이 일을 그만두게 될까 궁리를 한다. 아니 언제쯤이면 이 숙제에서 놓여날 수 있을까 기대 아닌 기대를 하곤 한다.
SNS에 올라오는 고양이 사진들. 특히 길고양이 사진들을 대하는 내 마음은 일반적이지 않다. 귀여운 그 모습과 표정에 스며있는 두려움과 경계심이 보이기 때문이다. 며칠 내린 비로 밥그릇은 흙탕물이 튀고, 비에 젖은 사료가 퉁퉁 불어 먹을 수가 없어 몹시 허기졌을지도 모를 그들을 그저 귀여워하는 마음으로만 봐지지가 않기 때문이다. 더 귀엽고 멋진 장면을 위해 사진기를 들이대는 시간 대신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찾아주는 사람의 마음이 나는 더 귀하고 그립기만 하다.
고양이를 잘 아는 나는 참는다.
다가가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는다.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고 눈을 마주쳐야 하는지,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해야 하는 것쯤을 이미 알면서도 나는 참는다. 너는 가볍고 재빠르지만, 정작 너를 맘에 둔 상대가 너무 빠르게 다가오면 놀라 도망치는 새가슴을 지녔다. 너는 또 그렇게 겁이 많으면서도 모험심이 있고 장난치기를 좋아하는 천진난만한 아이와 같다.
천변 산책 중이었다. 5월의 연두를 품은 풀빛이 초록 초록한 풀밭에 이름 모를 노란 꽃대가 올라온 모습이 너무 예뻐서 폰을 꺼내 담는 중이었다. 그런데 사진을 찍다 보니 작은 눈망울 한쌍이 내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만약 겨울이었다면 그 모습이 또 안타까워 마음 많이 쓰였을 테지만 춥지 않은 계절의 천변 풀밭에서의 마주침이니 이 또한 다행이었다.
듣는 이에 따라 감정 과잉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캣맘 초기 거친 환경에서 태어나 위험 속에서 살다 죽어가는 묘생이 안쓰러워 자주 힘들곤 했었다. 본격적으로 장마가 시작되기 전 어느 여름날, 잎이 무성한 나무 아래를 지나가다가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 눈에 띄는 벤치에 앉아 혼자 운 적이 있다. 오전 요가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대로변이었으니 차 안에서 이 광경을 본 사람들은 각자의 상상으로 마주쳤을 특이한 장면이었을 거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세상의 모든 안쓰러운 고양이들을 내가 다 구조할 수도, 밥을 줄 수도 없을 일이었다. 이 무렵 길 고양이들을 대하는 내 감정상태는 슬픔이 많아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참 많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가끔은 내일에 대한 걱정보다는 지금 그 순간의 평안에 만족하는 듯 보이는 고양이와 마주치기도 했다.
그 사이에 나의 메르씨와 초원이가 가족으로 들어왔고, 7년을 함께 했던 초원이가 천국으로 간 지도 몇 년이 지났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길 고양이들 밥을 주러 다니지만 예전처럼 많이 아파하지는 않는다. 몹시 피곤한 어떤 날 하루 밥을 건너뛰게 되어도 다리 뻗고 잠을 잘 수도 있다.
여전히 사랑 많이 받고 있는 삼색 고양이를 보면 깊숙이 숨겨둔 마음 한편이 찌르르 아파지곤 한다.
집 밖에서 보는 일은 더욱 그렇지만 그렇다 해서 다가가 덥석 안거나 눈을 마주치지도 않는다. 그저 지금 내가 너에게 할 일은 네가 배고프지 않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게 해주는 일일 뿐이라는 듯 단호하게 밥과 물을 주고 돌아서 온다.
왼쪽 : 2017년의 S.N.S 스토리에서 알려온 소식 속 길냥이 밥 주던 장소와 밥 사진 , 오른쪽 : 최근 천변 산책길 고양이가 있던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