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윤선 Mar 27. 2022

나 혼자 간다

우아하고 자유롭게 고독을 즐기는 일


혼자 식당에 가  밥 먹는 게 이상하지 않은 요즈음이지만, 아직도 혼자 식당을 찾아 음식을 주문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쪽이 일반적 정서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요즈음은 여럿이 말고 호젓한 일상이 꽤 자연스러워졌다. 심지어 권장되는 느낌마저 든다. 왜? 지금은 거리 두기가 미덕이 된 전염성 코로나의 시기이니까.  헌데 돌이켜보니 나는 코로나 이전에도 여건이 되면 혼자 다니는 걸 즐기는 쪽이었다. 새로 생긴 비건 식당에 꼭 가봐야겠다 싶으면 혼자서 찾아갔고,  놓치고 싶지 않은 전시나 영화 같은 게 생겨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해외여행도 혼자서 몇 번이나 다녀왔다. 물론 모든 게 낯선 해외 여행지에서 힘이 되어줄 친구가 절실한 적도 있었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게 '자유'를 향한 갈망(?)이었다.



선호하는 극장에서 '노매드 랜드'를 상영한다고 했을 때, 더 이상 꾸물대다가는 놓칠 것 같아서 불현듯 나섰던 게 지난 6월 초의 일이다.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영화라서기보다는 포스터에 표현된 장엄한 대자연을 물들인 노을빛의 황홀이 자꾸만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마침 내가 가려는 상영관 근처에는 좋아하는 비건 카페가 있었다.  어떤 영화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의 여운을 느껴보는 것도 내겐 중요한 부분이다. 그렇기에 영화를 좋아하는 비건이 영화 관람 후 갈만한 카페가 있다는 건 썩 괜찮은 조건이었다.



'노매드 랜드'는 유랑자, 유목민을 이르는 영어 단어이다. 배우 프란시스 맥도맨드가 연기한 주인공 '펀'은 추억과 안정감이 깃든 도시를 떠나 작은 밴과 함께 낯선 길 위에서의 세상을 향해 떠난다. 그 여정에서 펀은 각자의 사연을 가진 여러 노매드들을 만나게 된다. 광활한 자연과 길 위에서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 노매들과의 스쳐가는 만남은 과장 없이 절제된 영상과 연출 앞에서 애틋하리만치 긴 여운을 준다.  


만약 삶의 기준을 현실적인 안정에 둔다면 그들의 삶은 불안하기 그지없는 한낮 부랑자의 삶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준을 근원적 '인간' 존재 자체에 둔다면 그들의 삶은 주체적으로 선택한 자유로움 속에서 아름답게 파도친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자연의 색채, 일몰 무렵 끝없이 이어지는 길 위에서의 운전, 그리고 주인공 펀이 마지막 바라보던 바다의 장엄함,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확 트이는 느낌이었다. 영화적 미쟝셴을 즐기는 내 취향에는 아주 잘 맞는 영화였다.



좋은 영화를 보고 난 후에는 간혹 너무 다른 현실과 마주하며 가슴이 뻐근해지도록 허망한 느낌에 사로잡힐 때가 있었는데 그건 영화를 좋아하던 소녀 때부터의 버릇이기도 하다. 그래서 카페 거북이로 갔다. 스스로를 달래 줄 어떤 공간이 필요했는데, 역시 모든 게 마음에 들었다. 다른 때 보다 어쩐 일인지 손님도 적당했고 등나무를 엮어 만든 흔하지만 엔틱 한 램프가 놓여있는 구석 테이블도 비어있었다.


혼자 왔으니까 적당히 너무 배부르지 않은 디저트와 오트밀 라테를 주문했다. 비건이 비건 카페에 와서 특히 마음 편한 게 주문하며 일일이 '이거 빼주세요' , '저거 빼주세요'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전보다 비건 인구가 늘어났고,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지만 아직도 비건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이건 누구의 탓도 아닌 이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의 편향성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간혹 "저 비건인데요, 생선은 먹어요"라는 웃픈 멘트라든지, '우유'가 가진 폭력적 진실을 꽁꽁 숨긴 채 화려한 디저트며 유제품들이 우리의 눈을 현혹하는 것이다. 달콤한 얼굴로 알 권리를 막아버리는 것이다.


  '나 혼자 간다'라는 제목을 앞에 두고  잠시 이런 생각이 들어온다. 아니 질문을 생각해본다.   

  "너 사실 맘에 맞는 친구와 시간 맞추기가 어려운 게 아니고 네 곁에 그런 친구가 없는 거지?"

  "사실 너 비건이 된 후로 왕따가 된 거지?"
  " 아니 너 스스로를 소외시킨 거지? "라는 질문 말이다.


가정이지만 누가 그렇게  물어온다면, 굳이 부정하지 않으려 한다. 

'고독'과 친구가 되는 일의 품위 있는 시간을 맛본 이후 '친구'의 개념이 확장되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너무 거창한 설명 없이도 결국엔 혼자 나고 혼자 돌아가는 길 아닌가.  그래 그냥 지구의 시민으로서 열심히 살아왔으니 나에게 시간을 주는 거라고 최소한의 단순한 대답을 준비해볼까 한다. 결국 아무도 대놓고 물어보진 않을 테지만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감정 상하기 전 요가 <번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