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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선 Jun 06. 2022

현미 왕주먹밥 도시락

토끼 오이와 호두는 친구

언젠가 완성된 도시락을 도시락의 주인공에게 건네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나도 이런 도시락 싸주는 엄마가 있으면 좋겠다"라고. 그러자 주인공은 나를 향해 '씩' 미소와 함께 엄지 손가락을 치켜들며 바쁜 출근길을 나섰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또 뭐라고 대답을 했는데 선명히 기억되는 내 말에 비해 뭐라 했는지 흐릿하다. 아무래도 답변이 기대에 못 미치는 반응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지 결국은 도시락 싸기 힘들다는 공치사를 하고 만 것이다. 사실 좋아서 하는 거면서 말이다.


비건 아들의 도시락을 싼 지가 어느덧 10년을 넘어 20년이 다 되어가는 듯하다. 초등학교부터 시작해 이제 직장인이 되었으니 그렇다. 아이의 비건 입문기는 예전 글에서 여러 번 얘기했던 것 같아 생략. 아무튼 그렇다 보니 이제 도시락으로 웬만한 메뉴는 다 싸줘본 것 같다. 겨울에는 보온 도시락에 따뜻한 국과 카레를, 디저트로 비건 요구르트에 과일토핑까지 얹어 싸 준 적도 했다.  


도시락 준비를 하려면 아무리 간단히 싼다 해도 출근 전 최소 1시간 전에는 일어나 있어야 한다. 그렇다 보니 새벽 5시 반에서 6시면 도시락을 안 싸도 저절로 눈이 떠지는 현상이 생기게 되었다.  일찍 잠들건 늦게 잠들건 늘 같은 루틴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점점 도시락 싸는 일이 전과 같지가 않다. 아이도 이걸 눈치챘는지 도시락을 싸주시면 너무 감사하고, 아니어도 근처에서 비건식 먹을 수 있다며 부담을 덜어주려 애쓰는 게 보인다. 하지만 퇴근 후 싹 깨끗이 비운 빈 도시락 통을 볼 때면 못 싸준 날이 맘이 쓰이곤 했다.


그래서 주먹밥을 싸기로 했다. 그것도 아주 빅 사이즈로다가 왕 주먹밥 말이다. 갓 지은 밥이면 더 좋겠지만 전날에 남은 밥도 괜찮기로 했다. 주먹밥의 간은 시중 마트와 한살림에 나와있는 주먹밥용 가루를 이용했는데 전성분이 국산 야채와 김이어서 비건도 오케이였다.


레시피랄 것도 없이 간단하지만 한 번 적어본다. 그저 더운밥을 넓은 보울에 살 살 퍼 담고 밥의 양에 따라 주먹밥용 가루를 넣는다. 소금 살짝 치고 참기름도 살짝, 통깨 살짝 골고루 잘 섞어서 주먹 모양으로 꽉 꽉 쥐며 모양을 잡아 준다. 무말랭이 무침이나 연근이 있으면 장식 겸 한편에 놓아줘도 좋다. 만약 없다면 사과나 오이 등을 토끼 모양으로 잘라 장식해준다. 어떤 날인가 도시락이 너무 금방 완성이 되어 시간이 남아 토끼 모양으로 오이나 사과를 깎아 넣었는데 직장인이 감동했는지 카톡을 보내왔다.


내친김에 주먹밥의 기원을 찾아보니 예상외로 그리 특별할 건 없다. 다만 아주 오래전부터 먼 길을 가거나 전쟁터 등에서 밥을 지어먹을 여건이 되지 않을 때 시장기를 면할 수 있도록 주먹 크기 정도로 밥을 뭉쳐서 가지고 다닌 데서 유래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도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서인지 주먹밥은 먹고 살기 어려웠던 시절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밥에 쇠고기·야채 등 갖가지 재료를 곁들이고, 갖은양념까지 해서 보기 좋게 여러 가지로 모양을 낸 주먹밥이 식당의 정식 메뉴로 등장하기도 한다.


내가 만드는 비건 주먹밥에는 집에 있는 호두를 한 알씩 꾹 꾹 주먹밥 위에 눌러주는 것으로 마무리를 한다. 어느 날엔 깻잎으로 주먹밥을 싸서 담기도 했다. 생 깻잎에서 나는 향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향기롭고 주먹밥과 잘 어울린다. 그리고 또 어떤 다른 날의 주먹밥에도 무언가를 곁들일 수가 있는데 그건 각자의 집안 냉장고 속 사정에 따라 다양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세 자매 중 오랜 시간 엄마의 도시락을 먹은 건 동생뿐이다. 어쩌다 돌아가신 엄마 얘기, 그러다 도시락 얘기까지 나오면 동생이 '울컥' 하는 걸 못 본 척하며 본 적이 있다.
'언젠가 아들도 내가 싸주던 도시락을 떠올리는 때가 있겠지'라는 생각을 하려다가 접는다. 그런 생각을 하기엔 나는 아직 젊고 게다가 어울리지 않게 신파적이기 때문이다.


팩트는 도시락을 일일이 밥과 반찬 갖춰 싸기가 어렵고 귀찮을 때, 그렇다고 아무거나 패스트푸드를 먹고 몸을 망치곤 싶지 않을 때, 어차피 해 먹는 현미밥에 비건 인증된 야채나 버섯 가루 시즈닝을 이용한 쉬운 도시락을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어려운 시절에 먹던 그리운 맛 그런 게 아닌 진심 쉽게 만들어 먹는 건강한 끼니에 관한 이야기일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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