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독자분이 내 책을 읽다 말고 책장을 덮었다는 리뷰를 읽었다. 어쩌다 검색해 보곤 하는 독자 리뷰 중 이런 리뷰는 처음이었다. 긴 리뷰는 아니었고 핵심은 '본인이 한창 요가를 재미있게 하고 있는데 요가 수련자에게 고기 먹지 말라고 강요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상했다'는 대략 그런 내용으로 기억된다. 읽고 난 후 좋을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았다.
'요가 에세이' 이자 '감성 에세이' 혹은 그냥 '에세이'인 '감정 상하기 전 요가'의 마지막 장인 제4장의 제목을 '지금 이 순간, 아힘사 플로우'라고 정했다. 영어 'flow플로우'는 필자가 좋아하는 단어로서 한글로는 '흐름'이라는 뜻이자 산스 크리스트 어인 'Vinyasa' 와도 같은 뜻이다. 그간 운영해 온 '니콜의 flow흐름 요가'의 탄생과도 무관하지가 않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아힘사 플로우'라는 장에서는 요가 수련을 하는 목표이자 지향하는 지점에 '아힘사 라이프' 즉 '자비로운 생활방식'이 존재하는 것이 바람직할 거라는 뜻을 알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더불어 작가는 운문이든 산문이든 진짜 하고 싶은 얘기를 맨 마지막에 하는 경우가 흔하다. 물론 쓰는 스타일 따라 아닐 수도 있지만 말이다. 4장의 제목을 그렇게 정하고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들을 모으며 어쩜 진짜 하고 싶은 얘기로 책의 마무리를 하고 싶었나 보다.
그렇다면 'Ahimsa, 아힘사'는 무엇일까? 널리 알려지다시피 이는 요가 철학 속 요가의 8단계 중 첫 번째 단계인 'yama야마' 속에서 요가 수련자로서 지켜야 할 계율들을 말한다.
다섯 가지의 야마 중에서도 첫 번째 자리에 놓인 게 바로 '아힘사'로서 품은 뜻은 '비폭력'과 '불살생'을 말한다.
나는 윤리적 이유로 비건을 선택한 사람이지만, 책 속에서건 일상에서건 육식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속 유태인 대학살의 야만적 전범인 채식하는 '히틀러'가 있었고, 죽음도 불사한 채 유태인들을 구해낸 채식하지 않는 '오스카 쉰들러'가 있었다(쉰들러가 육식인인지 채식인인지 밝혀진 게 없기에 통상적인 채식인이 아닌 걸로 규정함).
일일이 그 사례들을 찾아 나열하지 않아도 이분법적 사고 아래 성품을 판단하는 걸 내켜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사실과 근거를 알렸을 뿐, 어디까지나 선택은 읽는 사람의 몫이 될 것이다.
내친김에 가만히 책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는 그 독자분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추측컨대 그는 요가를 사랑하는 요가 수련자로서 요기의 수련 덕목인 '아힘사 철학'에는 공감하고 있었을 거라고 본다. 그러나 현대를 살며 이런저런 상황과 본인의 의지로 실제로 자신은 '아힘사 라이프'를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이 현실을 자각하자 들기 시작하는 불편한 감정. 육식을 얻기 위해 희생되는 생명들의 고통에 외면되지 않는 감정. 이 두 감정이 충돌하며 미처 예상치 못한 또 다른 감정이 책장을 덮게 만들었을 거란 생각을 해본다.
처음에 이 독자분은 글과 연결되는 아름다운 삽화가 좋았고, 본인이 수련하며 느꼈던 에피소드에 공감해 이 책을 집어 들었다고 했다.
나는 이 독자분의 내면 안에 누구보다 충만한 '자비로운 마음'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아힘사 라이프'가 '요기'로서 지켜야 할 '요가 철학'의 덕목인 '야마'라는 부분에 이르러 사실은 매우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책을 쓴 작가로서 나는 그 마음결을 달래주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다. 혹시라도 기회가 되어 그와 연결이 된다면 내가 평소에 먹고사는 비건 이야기를 소개하고 싶다. 가능하다면 맛있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비건 음식을 앞에 두고 요가 수련과 에너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기도 하다.
요가 수련자는 육식하면 안 된다고 지적하거나 비판할 생각은 전혀 없다. 책 '감정 상하기 전 요가'에서도 밝혔지만 '아힘사 라이프'가 꼭 먹는 것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인간으로서 아니 수련자로서, 수련을 전하는 전달자로서 '아힘사적인 말투' '생각' '행동' 또한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힘사 라이프에서 요기가 '먹는 음식'은 단순히 육체의 허기만을 채우는 것이 아닌 걸로 본다. 육체의 허기를 넘어 마음과 영혼에까지 미치는 것, 거기서부터 '불살생의 의미'를 살펴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1년, 아니 10년, 15년이라는 식의 수련해온 기간과 꼭 비례하는 것만도 아니다. 대신 '얼마나 진지하게 수련해왔는가'가 요기의 진보 상태를 보여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요가 수련'을 '자세'의 숙련 정도에 목표를 두지 않는 이상 '요가 수련의 진보'를 말하며 '아힘사 라이프'를 별개로 보는 것은 대단한 모순이 아닐까 싶다.
일찌감치 비건과 요가 수련을 몰랐다면 '내 책을 읽다 덮어버렸다'는 사실 앞에 불쾌한 감정이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그렇지가 않은 나는 여전히 '아힘사 라이프'의 완성을 꿈꾸는 수련자다. 그런 의미로 도반으로서 그 독자분을 대해 보고 싶다는 것이다.
부드럽고 평화로운 상태로 마주 앉아 '아힘사 라이프'에 대해 수다를 떨고 싶다는 소망을 가져보는 것이다. 물론 상대가 원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