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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선 Jun 30. 2023

수라, 추앙받아야 할 아름다움

<영화 리뷰>  수라를 보고 나서

영화 수라를 보고 온 지 3일 차이다. 보고 난 직후의 차오르는 마음 같아서야 즉시 멋진(?) 리뷰를 써 올릴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오늘에서야 쓰다 만 리뷰글 초고를 열어보니 시작하는 글의 초고만도 여럿이다. 고작 이 정도의 글쓰기가 왜 그리 어려웠던 걸까. 생각해 보니 그 까닭을 알 것도 같다.


영화 속 주인공의 대사 중에 '너무 아름다운 것을 본 죄'라는 말이 나오는데, 내게도 이 죄가 해당되었기 때문이었을까? 누구에게라도 쉽게 잊힐 대사는 아니었다.


대본 속 대사가 아닌 실제 대화와 감독의 내레이션으로 흐르듯 진행되는 이 다큐멘터리 영화 속에서의 화면은 지나치게 아름답다. 이 엄청난 화면이 영화를 구성하는 주요한 요소인 '미장센'이라고 할 때, 이토록 압도적인 미장센을 최근 들어 본 기억이 있었나 싶다.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 별들의 주기로 일어나는 밀물과 썰물을 기다리며 갯벌은 깨어나고 잠들고를 반복해 왔다. 그것은 자연과 우주의 법칙이었다. 바다도, 갯벌도, 태양도, 달도, 노을도, 새벽도 그 순간에 평화롭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의 지시로 이곳의 물길이 막혀버린다. 수 천년동안 수백 년 동안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이 차오르기를 기다리던 바다와 갯벌의 생명들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영화 수라 메인 포스터


겨울 갯벌 수라에서 황윤 감독


'언젠가 물이 들어올 거야' 메말라가는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기다렸다. 지금껏 늘 그래왔기에 언젠가는 '물이 오겠지'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철새들도 추운 계절을 피해 지구 반바퀴를 날아 여기로 온다. 거센 파도와 태풍과 눈보라 속 밤과 낮을 오직 작은 두 날개에 의지한 채 쉬지 않고 날아오느라 기진맥진 한 채로 도착하는 곳이 여기 새만금 갯벌이었다.


간척지 즉 땅을 넓혀서 공항을 짓고 대규모 상업 단지를 조성하는 대규모 사업을 이유로 물길을 막자 갯벌은 견디지 못한다. 철새들은 거기서 떼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얼마나 쉬고 싶었을까. 따뜻한 해안가 부드러운 모래흙을 밟으며 함께 날아온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말이다.


황윤 감독은 < EBS 뉴스 >와 가진 인터뷰에서 "(갯벌이) 살아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수라 갯벌과 멸종위기 생명체들, 그것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사람들을 위해 카메라를 들었다고도 했다.


지난 7년의 보고서인 <수라>엔 갯벌에 사는 동식물들의 생명력과 아름다움, 그런 갯벌을 지키고자 기록하는 행위로 저항하는 사람들의 의지가 오롯이 담겨 있다.   - EBS 뉴스 인터뷰


'너무 아름다운 것을 본 죄'라는 말은 도요새의 군무를 목격한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장을 맡았던 주인공 오동필 씨가 했던 말이다.


그 아름다운 도요새들의 비상과 비행을 본 주인공은 그것을 본 이후 철새들이 날아왔던 그 갯벌이 파헤쳐지는 것을 차마 보기 괴롭다. 나아가서 그것들을 10여 년 동안 지켜보며 기록한다.


'수라는 다 죽었다', '수라는 육지화돼서 더 이상 보존 가치가 없다'는 정부의 주장에 그들만의 방식으로 저항을 이어오게 된 것이다.


'수라'는 미군의 땅이 아니라 고라니의 영토

'수라'는 일곱 빛깔 모습으로 변신하는 칠면초의 영토

'수라'는 개개비의 영토

'수라'는 겨울을 나기 위해 몽골에서 내려온 잿빛개구리매의 영토

'수라'는 쇠제비갈매기의 영토

'수라'는 매일 아침 물고기를 먹으러 출근하고 오후엔 잠잘 곳으로 퇴근하는 가마우지의 영토

          <수라> 내레이션 중에서


위의 글은 영화 <수라> 내레이션 중 화면을 뚫고 시처럼 흘러나오던 대사다. 이후 주제곡 '아름다운 것들'도 영화와 어울려 감동과 울림을 주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이 내레이션이 말로 이 영화의 주제를 다 보여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이유로든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다. 게다가 그것은 쟁취를 위한 폭력이다. 설사 그것이 공익을 추구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더구나 새만금 간척사업의 시작은 부족한 농토를  충당해 농민의 살림살이과 사기를 높이기 위함이라고 했다는데, 지금 현실은 그때와는 사뭇 달라졌다고 한다.


대대로 거기서 터전을 잡고 살아온 그곳의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다. 두 말할 나위 없이 그 갯벌의 주인인 생명체들은 죽음으로 진실을 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업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한다. 작렬하는 굉음을 내며 초고속 비행기가 지나가고 지축을 울릴 듯한 당당함으로 포클레인이 지나간다. 바로 옆에 불안한 둥지 안에서 아기 도요새가 떨고 있는데도 말이다.


정부에서 새만금 간척 사업을 발표했을 당시의 뉴스가 생각이 난다.


 2003년 3월 새만금 갯벌 살리기를 위한 오체투지 삼보일배를 하던 문규현 신부님을 비롯한 시민단체분들의 절박했던 오체투지 모습도 떠오른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기억하고 지켜보며 힘을 보태야 할 일이 생겼다. 세상을 살며 제 아무리 공감해야 할 아픔과 고통이 많다고 해도, 온통 잊어버리고 싶은 스트레스 투성이라고 해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은 있다.


누구나 '아름다운 것들' 앞에서는 행복해진다. 그렇기에 '아름답다는 것'은 추앙받아야 마땅한 일이지 결코 죄가 되지 않는다. 도리어 '죄'는 아름다움을 파괴하는 쪽에 있다고 본다.


새만금, 아니 다 밀어버리고 이제 마지막 남은 갯벌 '수라'를 반드시 지켜낼 수 있기를 바란다.


어쩌면 '수라'를 지켜내는 일은 우리 삶의 터전을 지켜내는 일 일 것이다. 눈앞의 이익에 급급한 채 살아온 우리 인간들이 이제라도 어머니 지구를 지구를 지켜내는 일일 것이다.


지금 당장 그것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현재 개봉 중인 '수라'를 극장에 가서 보는 일 일 것이다. '예약'을 하는 일일 것이다.


물방울 하나가 모여 물줄기를 이루고 호수를 만들고 강으로 흘러 바다로 나아간다.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황윤 감독님께 특별한 감사를 드린다.

2003년 새만금에서 서울까지 목숨을 건 삼보일배 행진중인 성직자와 시민 단체 회원들
새만금 간척사업이란 국가폭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당초엔 간척지를 식량을 생산하는 농경지로 쓴다고 했다가 산업단지 부지, 태양광 발전단지 등으로 계속 목적을 바꾸며 공사비만 퍼붓는 상황이다. 이런 와중에 지난해 6월 국토교통부는 새만금 국제공항 개발사업 기본계획을 수립·고시했다. 총 8077억 원을 투입하여 현재 일부 바닷물이 들어와 유일하게 남은 수라 갯벌을 메우고 활주로, 여객·화물터미널, 계류장 등을 2028년까지 건설해 2029년에 문을 열 계획이다.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과 환경·시민단체들은 수라 갯벌을 지키기 위해 갯벌에 살아가는 법정 보호종을 조사하여 갯벌의 생명력과 아름다움, 가치를 알리는 데 힘쓰고 있다. 새만금 국제공항을 추진하는 쪽에선 수라 갯벌이 이미 갯벌의 기능을 잃었다고 주장한다. 수라 갯벌을 지키려는 쪽에선 수라 갯벌이 살아있다고 반박한다. <수라>는 수라 갯벌이 숨을 쉰다는 증거와 다름이 없다. 그리고 <수라>는 우리에게 묻는다. 수라 갯벌이 누구의 영토인지.
                                                             - 신문 기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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