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에 입양처를 구하는 아기 고양이 둘의 근황이 날마다 도배를 하듯 올라오고 있다. 현재 그 고양이들을 임시 보호하고 있는 분들은 재개발 지역에서 위험에 처한 고양이들을 오랫동안 돌보는 일을 해온 분들이다.
1달 막 지난 아기 고양이들의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저릿저릿해진다. 자신들이 완전히 정착하지 못했다는 걸 아는지 천진한 눈빛 속에 불안감이 살짝 서려있는 것도 같다.
가족을 구한다는 광고 피드는 계속 올라오는데 입양자는 쉽게 나오질 않는 모양이다. 임보하고 있는 분에겐 이미 4 묘가 있고부모님도 함께 살고 있다고 한다. 하여 안전한 입양처가 나올 때까지 임시보호를 하고 있는중이었다.
세상이 다 얼어붙을 것처럼 춥던 작년 겨울의 어느 날, 올라온 사료후원 공고를 보고 채식 사료를 몇 번 보내며 메시지를 나눈 인연이 있던 터였다. 구해낸 새끼 고양이들의 가족을 찾는 일에 얼마나 애가 탈까 그 마음이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나는 일부러 한 동안 피드를 보지 않았다. 너무도 귀여운 아기 고양이들 사진과 함께 올라오는 '가족이 되어주세요'라는 호소 글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감정에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오랜만에 방금 들어가 보니 '과일 남매' 중 '사과'가 그 사이에 입양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과와 살구' 남매가 함께 입양되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렇진 못했나 보다.
하지만 책임감과 여건이 되어야만 입양을 보내는 확실한 기준을 우선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사과가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기를 바랄 뿐이다. 혼자 남은 아기 고양이 살구에게도 평생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책임감 있고 멋진 집사를 만나게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이다.
기왕에 시작한 고양이 입양 얘기에 내 얘기를 살짝 얹어보기로 한다. 고양이와 가족이 되어 살며, 내가 사는 곳 근처 길 고양이들 밥을 주며, 소위 집사생활 14년 차에 접어들었다.
가까이하기는커녕 만지지도 못하던 나로서는 큰 변화라면 변화라 할 만한 일이다. 동물들이 고통받는 게 싫어서, 그 현실을 알고 난 후 윤리적 비건 생활방식을 선택했음에도 생활 속으로 들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아를 떨며 차를 마신다거나, 깔끔히 차려입고 지인을 만나러 가는 일에는 익숙했으나, 더러워진 길고양이 밥그릇을 맨손으로 치우거나 정리하는 일이 일상이 될지 정말 몰랐다.
아기 때 엄마에게 버림받은 고양이 메르씨가 온 후 내 일상은 달라졌다. 무슨 사연으로 메르씨의 엄마는 아기 고양이 삼 남매를 야생에 두고 사라진 것인지. 자신이 키울 처지가 못되니 누군가 안전하게 데려갈 때까지 숨어서 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 또한 모를 일이다.
지난 계절엔 개 산책 시키는 일을 부탁받고 한 경험이 있다. 고양이와 달리 개에게 산책이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일상이었기에 산책자에게도 교육이 필요한 일이었다.
특이한 건 산책 중에 만나는 같은 개 산책자들 중 꽤 많은 이들이 산책시키는 개의 품종을 물어오는 거였다. 나는 그걸 묻는 이가 데리고 나온 개의 품종이 궁금하지 않은 데 말이다. 그런 걸 궁금해하지 않는 나는 내가 산책시키는 개의 품종을 알지 못했다.
조용하고 품위 있는 데다 잘생긴 그 친구는 보호소에서 데려와 입양한 개였다. 품종보다는 내가 산책시키는 녀석과 마주치게 될 다른 녀석이 과연 교감을 할지, 안 할지가 더 궁금했었다. 이 경우는 고양이도 마찬가지다.
나는 어쩐지 이 궁금증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처음 만나면 별 일 아닌 듯 툭 툭 던지는 질문과도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느 지역, 어느 학교 출신인지. 몇 살인지, 어느 아파트에 살며 몇 평 인지, 결혼은 했는지 등을 궁금해하는 심리 말이다.
해마다 증가하는 반려동물 가족과 비례하는 유기동물 숫자의 증가 뉴스를 접하는 일은 씁쓸하기만 한 일이다.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는 펫 산업의 실체를 접하는 일 또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사는 도시에는 어디에나 동물을 돈 주고 살 수 있는 펫샵이 있다.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동물들의 학대 소식이며 펫샵 동물들이 생산되는 구조의 참상들은 씁쓸함을 넘어서는 참담함으로 다가오곤 한다.
사람들은 더 귀엽고, 더 순종적인 데다 품종이 좋은 동물을 구입하기 위해 돈을 지불한다. 그러니까 왠지 품종을 알 수 없는 강아지나 고양이들을 '유기견 보호소' 같은 데서 데려오는 걸 내켜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본질은 어김없이 여기서 또 발현되어 이 산업은 몇 년 사이에 비약적인 발전을 한다. 한 마디로 돈이 되는 사업이 된 모양이다.
여기 반려동물과 함께 한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이 있다. 꿈에도 생각 못한 삶이었고 심지어 무서워했던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가장 일관성 있고 꾸준한 삶으로 만들어준 존재가 내게는 고양이들이었다. 진짜 무서운 건 고양이보다 인간인 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내 주변에는 고양이를 반려하며 가족으로 사는 이들이 꽤 있다. 보컬리스트들, 동물권 운동가, 시인들, 비건 비즈니스를 운영하시는 분들, 요기들, 명상가들, 프레디 머큐리, 박연준 시인, 도리스 레싱, 그 외에도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고양이와 교감하며 살아간다.
누군가의 삶 속으로 고양이가 들어온다는 건 또 다른 우주가 들어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감당 못할 것처럼 크게 느껴지던 책임감 안에서 관대함과 유연함과 무엇보다 큰 사랑을 배워나가는 삶이다. 당신에게도 그런 기회가 찾아온다면 부디 사질 말고 입양하시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