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TP 그 여자

by 에바


초등학교 다닐 시절, 한참 혈액형별 성격이 유행이었다. 웹툰, 책, 영화 등 4가지 혈액형으로 사람을 분석하는 매체가 넘쳤더라지. 학년이 바뀌고 새로운 친구를 만나면 통성명 후 혈액형을 묻고 성격을 예단하는 일이 하등 이상할 게 없는 시대였다. 한때는 나도 꽤나 맹신했더라지. 어렸다는 핑계를 대자. 그 시절 단지 혈액형이 AB형인 죄로 천재 아니면 또라이란 말을 얼마나 들었던지. 결코 천재는 될 수 없었기에 그렇다면 또라이라도 보이자며 부단히도 노력했는지 여태껏 유별난 사람 취급받을 때가 종종 있다. 나름의 오기였을지도.


과학적 근거가 없는데도 여전히 혈액형을 믿는 사람이 꽤나 있다. 예전 회사에 다닐 때 어떤 남직원이 자신은 혈액형을 맹신한다 말했지. 속으로만 비웃었다. 별 차이는 안 나지만 몇 살 더 먹은 이를 향한 나름의 존중이었다.

웬만한 이의 혈액형을 맞출 수 있다며 기세등등하게 술자리를 가진 이들의 혈액형을 맞혀 갔지. 사실 그 남직원이 몇 명의 혈액형을 맞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확실히 기억하는 건 내 혈액형은 틀렸다는 것. 멋쩍어하며 목덜미를 쓸던 모습이 떠오른다. 서른한 가지 아이스크림을 파는 브랜드의 최애 맛을 맞힌 것도 아니고 고작 4가지뿐인 혈액형을 맞히는 게 뭐 그리 대단타고 유세를 떨었을까. 우리나라야 혈액형이 다른 나라에 비해 비등비등하니 그래 맞히는 게 하나의 게임(?)이라 볼 수 있겠지만, 많이들 알다시피 페루 원주민은 100% O형이라는데 그럼 페루 원주민은 성격이 한 가지야? 이거 아니잖아.


요즘은 MBTI가 유행이다. 어쩐 일인지 근 몇 년 사이 MBTI 관련 글이 부쩍 많아졌다. 4가지던 성격이 16가지로 무려 4배나 늘었다! 어쩐지 매우 많아진 느낌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77억 명의 인구를 16으로 나눠 봅시다. 4억 8천, 4억 8천 명의 인구가 같은 성격이다! 우와 나랑 같은 성격의 사람이 4억 8천 명이나 있어! 4억 8천 명이면 우리나라 인구의 몇 배야? 당장 회사만 가도 나랑 안 맞는 사람투성인데 4억 8천 명 다 어디 갔어?


나에 대해 알아보는 일은 중요하다.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니 얼마나 의미 있는 행위인가. 그런데 MBTI는 뭐랄까, 너무 가볍다. 너는 인프피니까, 나는 엔프제이니까. 쉽게 일반화하고 예단한다. 나도 너도 말이다.

이런 성격 검사가 부질(?)없다 느끼게 된 계기를 말해보자면, 내 성격 때문이다. 학교 다닐 때 성격 검사나 심리 검사를 했던 자료를 모아둔 철을 보다 MBTI도 보게 됐지.

2010.11.23 ISTP 백과사전형

2012.07.11 ENTP 발명가형

2012.09.14 INFP 잔다르크형

2019.04.23 INFP 잔다르크형

2020.03.02 ENTP 발명가형


2010년도의 나와 2012년, 2019년의 나는 상극이었다.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내가 언제든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증거다. 나는 ENTP야. 고작 알파벳 4개로 나를 정의하고 싶지 않다. 어떻게 보면 가성비가 좋다는 생각도 든다. 한 사람을 알기 위해 시간을 공유하고 대화를 하며 교감하지 않고 알파벳 4개만을 듣고 너는 어떤 사람이구나. 나랑은 상극이겠어. 쉽게 판단할 수 있으니. 비단 남에게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나를 알려면 나에게도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어떤 일을 했을 때 만족감을 느끼고 어떤 상황에서 분노하고, 어떤 사람과 잘 맞는지.


침대에 누워 손바닥만 한 화면에 [나는 낯선 사람과 쉽게 친해지는 편이다 - 그렇다 / 아니다] 선택으로 나를 설명할 수 없다. 대략적인 성향은 알 수 있겠지. 하지만 쉽게 친해진다의 기준은 무엇이며, 그 낯선 이의 나이와 성향에 따라 또 달라질 가능성이 무수한데 그걸 어떻게 그렇게 쉽게 판단해.


그저 재미일 수도 있다. 코로나 19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계속 계속 연장되는 시점에서 그저 재미로 노는 잠깐의 유행일 수도 있지. 그런데 말입니다. 2005년에 <B형 남자친구>라는 영화가 개봉했습니다. 관객 수 1,174,581명. 많이도 봤다. 내년엔 <ENTP 그 여자>라는 영화가 개봉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아직도 네이버에 B형 남자를 검색하면 2020년이란 게 무색할 정도로 혈액형에 대한 얼토당토않은 얘기들이 우후죽순 나온다.


B형 남자친구ㅣ최석원 ㅣ이동건, 한지혜ㅣ2005


이런 매체들 덕에 B형은 그저 B형인 죄로 싸가지 취급을 받고, A형은 그저 A형인 죄로 소심한 사람 취급을 받았을 테지. 나는 또라이 취급을 받았고. 사실 혈액형으로 성격을 나눈다는 건 21세기 지성인이라면 누구나 과학적 근거가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란 걸 알 테다. 그렇기에 혈액형과 MBTI를 같은 선상에 놓고 이야기하는 이 글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MBTI는 유명한 성격 검사니까. 과학적 근거에 대해서는 왈가왈부가 많은 거 같지만 전문가가 아니니 그건 모르겠고. 어쨌든 학교를 비롯해 여러 기관에서 돈을 지불하면서도 시행할 정도면 어느 정도 검증은 된 검사겠지. 검사를 받고 나는 '아 INFP 잔다르크형 이구나'에서 끝나야 한다. 허나 거기서 끝이 아니라 MBTI 별 절대로 하지 않을 말, 사복 패션, 사고 시 대처 유형, 궁합 등등등 이게 십여 년 전 혈액형별 성격 유행했을 때랑 뭐가 다른가. 재미로 치부하기엔 도를 치나친 감이 있다. 다들 재미로 보라 하지만 자꾸 이런 데이터가 쌓이게 되면 야금야금 편견이 만들어지고 선입견이 생긴다. 그런 것들이 나에게도 너에게도 무의식적으로 MBTI 유형에 맞게 행동이나 생각을 제한할 수도 있으니 이제는 좀 '재미로 보는' 것을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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