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공간
어떤 계기가 따로 있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느 순간부터 바다를 동경했다. 친구랑 여행을 가더라도 꼭 바다가 있어야 하고, 겨울이라 바다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바닷가 산책을 하던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가든 코스에 어떻게든 바다를 넣었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수평선도 좋고, 하늘을 가리는 높다란 건물이 없는 것도 좋고, 배가 있으면 배가 있는 대로, 부표는 또 부표대로 그냥 바다에 있는 물체가 바다와 어우러지는 모습이 좋다. 잔잔히 물결치는 소리는 자장가처럼 졸음을 불러오고, 세찬 파도소리는 활력을 불어 주고. 한강의 물비린내와는 다르게 바다 특유의 짠 내도 그저 이유 없이 좋다.
바다에서 가장 좋아하는 행위는, 당연 물멍. 모래사장에 앉아 있노라면 머리를 쓰다듬듯 부는 바닷바람, 간만에 사각 틀을 벗어난 눈앞에 넓게 트인 시야, 이어폰이 따로 필요 없는 자연 ASMR인 파도 소리, 코끝을 간지럽히는 바다 내음, 미각은... 바닷물은 안 마셔도 짠 거 아니까 느꼈다 치고, 오감으로 체험하는 바다 물멍.
어렸을 때부터 잡생각이 많았다. 타인보다 쉽게 피로감을 느낀다 생각할 때가 종종 있는데 어쩌면 잡념이 많아서 일 수도. 몸은 가만히 있어도 생각은 멈출 기미가 없으니 피곤할만도 하다. 그래서 무념무상의 상태로 한 가지에 몰두할 수 있는 작업을 좋아한다. 뜨개질이나 퍼즐이나 DIY 명화 그리기 등등 몇 시간 동안 붙잡고 있어도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 없는 것들. 그 중에서도 바다 멍때리기는 육체 활동도 필요 없으니 가히 완벽하다 볼 수 있다.
거기에 물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 공포와 두려움을 수반하는. 수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진짜 물귀신이 있나 싶을 정도로 물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질 때가 있는데, 단순히 어릴 때부터 학습된 문화적인 공포심(구태여 말하자면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원한이 제일 깊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인지, 아니면 정말 물이라는 것이 어떠한 기를 가지고 있어 사람을 홀리는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물을 바라보면 평온하면서도 두려운 양가감정이 생긴다. 보통은 물을 좋아하거나 무서워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나는 두 감정을 모두 가지니, 어렸을 땐 전생에 물과 관계가 깊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스물 살이 넘고 사주를 보다 알게 되었는데 물로 태어났다더라. 물을 무서워하면서도 좋아하는 마음이 어쩌면 불가항력일 수도.
여기에 시간을 추가 하자면, 해가 뜨는 시간. 일출 보는 걸 좋아한다. 어찌 보면 좋아한다 말하기 민망하다 싶게 일출을 본 횟수가 딱 한 손이지만. 부러 시간을 내서 일출을 다섯 번 이나 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다섯 번의 일출 중 3번이 부산 태종대였다.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우연히 친구들과 부산 여행을 가게 되었다. 스케줄 상 둘, 둘 나눠 출발했는데 나와 한 친구는 무궁화 막차를 타고 부산에 가기로 했다. 첫 목적지가 태종대였고, 겨울이라 시간을 보니 잘하면 일출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산역에서 첫차가 뜰 시간까지 빈둥대다 110번 버스를 타고 종점인 태종대에서 내려 걷고 걸었다. 드문드문 아침 운동하는 사람들과 마주치며 운동하는 맘으로 걷고 걸어 등대까지 올라가고, 또 걷고 걸어 바다 코앞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았다.
이 순간 언어의 마술사가 아닌 게 한탄스러울 정도로 그 순간을 표현하지 못해 매우 아쉬운데, 그냥 벅찬 거 있잖아.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물론 열심히 걸어서 명당을 찾긴 했지만), 해는 그저 떠오를 시간에 매번 같은 모양으로 같은 동작으로 움직일 뿐인데. 그 순간만큼 아무런 걱정이나 고민 없이 그저 해가 떠오르는 모습에 집중 한다, 모두 한마음으로. 어둡던 하늘이 점차 밝아지면 해가 벌써 뜬 건가 싶은데 해는 보이지 않아, 그곳에 있는 모든 이가 안절부절. 새벽부터 일출 보겠다고 고생 고생했는데 못 보는 건가 이런 생각이 들 때쯤, 수평선 너머 황금빛이 번지면서 태양이 떠오른다. 엘도라도는 어쩌면 달에 토끼가 산다는 전설처럼 태양에 온통 황금으로 된 도시가 있다고 믿었던 전설이 아닐까. 싱싱한 계란 노른자 같기도 하니 써니 사이드 업이란 용어가 왜 생겼는지도 매우 공감 가고. 아무튼 기다림이 무색하게 순식간에 떠오르는 해가 야속하다가도 나란 존재가 있든 없든 지구는 계속 태양을 돌고 해가 뜰 테니 복잡하게 살 필요 없다고 근심 걱정 덜어줘서 고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