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욕망한다.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직역하자면 물의 모양이지만 사랑의 모양이라는 부제로 개봉했다. 멋없어..
언어 장애를 가진 주인공이 항공우주센터에서 청소부로 일하던 중 실험실에 갇힌 괴생명체와 만나게 된다. 주인공은 삶은 달걀로 괴생명체를 길들이다 사랑에 빠지게 되고 해부당해 곧 죽을 위기에 빠진 괴생명체를 빼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되는데...
123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때문에 영화 내용이 지루하지 않았어도 굉장히 왜케 안 끝나지? 이쯤이면 끝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몇 번 들었다. 결코 지루해서가 아니라 훅훅 일어나는 사건들이 손에 땀을 쥐게 해서 '제발 이쯤에서 끝내줘! 더 가슴 졸이기 싫단 말이야' 이런 기분. 중후반부부터는 계속 가슴이 쿵쾅쿵쾅 할 정도로 몰입해서 봤지.
깊이 없는 리뷰는 의식의 흐름에 따라...
살짝 아리송했던 건 왜 수중 괴생명체인데 해양부(?)가 아니라 우주센터를 배경으로 할까? 뭐 그 이유란 게 인간을 우주로 보낼 수 없어 인간보다 신체 기능이 뛰어난 괴생명체를 잡아 연구한다는 설정이긴 했지만 갠적으론 좀 띠용했다.
그리고 제목이 물의 모양인데 물이라 하면 모양이 없잖아. 어떤 용기에 담아야 모양이 생기는데, 이 괴생명체는 너무 또렷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어서 그것도 괜히 혼자 좀 아쉽. 제목만 봤을 땐 좀 말랑말랑한 이미지를 생각했었는데 또렷함을 넘어 단단해 보이기까지 했어.
문득 든 생각인데! 엘라이자가 괴생명체에게 이름을 만들어줬다면 어땠을까. 김춘수의 <꽃>처럼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같은 느낌으로. 근데 또 생각해보면 엘라이자와 괴생명체의 관계가 사랑이라기보다 주종 관계 같다는 후기도 꽤나 있었고, 나도 엘라이자가 삶은 달걀로 괴생명체를 유인? 할 때 조련사 같아서 좀 웃겼는데 정말 애완동물처럼 생각했다면 오히려 더 이름을 붙여줬을 것도 같다. 길냥이한테 밥 줄 때도 이름을 붙이는데 정말 길들일 존재로 생각했다면 그러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가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영화 <마더!>에서처럼 HIM이라서 이름을 붙이지 않았던 걸까 하는 생각도 드네. 아 근데 또 엘라이자가 언어 장애가 있어서 걍 이름을 따로 안 붙인 걸 수도 있으려나;;
괴생명체가 할배에게 상처를 입혔을 때, 할배 팔에 남은 상처 모양이 엘라이자 목에 상처와 같아서 엘라이자의 상처도 100% 괴생명체 짓이다! 생각했다. 엘라이자가 신생아 때 물에 빠진 걸 구조했다고 나오니까. 그리고 엘라이자가 괴생명체를 찾아 배회할 때, 목의 상처가 안 보여서 오! 괴생명체 신적 존재라더니 치유능력 있나 봐! 했지. 할배 상처도 낫게 하고 머리카락도 자랐으니까. 그러나 엘라이자의 상처는 낫지 않았고 마지막에 아가미 역할을 한다. 그 순간 그렇다면 역시 엘라이자 상처 괴생명체 짓이다! 신생아가 물에 빠졌는데도 살 수 있었던 이유는 괴생명체사 물에 빠진 아기한테 아가미를 만들어 줘서! 근데 그런 내용은 나오지 않더라;; 괜히 좀 아쉽.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가 흔하기도 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 만남 역시 식상하지만 그래도 기대했다.ㅋ
이쯤에서 마무리하며..
극장에서 처음으로 본 청불 영화였다. 청불 영화를 좋아하지 않아서 <셰이프 오브 워터>도 사실 처음에는 별로 볼 생각이 없었다. 굳이 노출과 잔인한 장면이 필요했을까. 이 영화에서 약자인 엘라이자의 욕망이 극을 끌어가는 중요한 포인트란 사실도 알고, 리처드의 자인한 면을 보여주기 위해 징그러운 장면을 찍었겠지만, 수위를 좀만 낮췄어도 충분히 좋은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선정적인 노출도 아니었고, 폭력성이 짙은 영화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수위를 낮췄다면 보다 많은 사람이 좋은 영화를 접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
생각해보면 미디어가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는 사회에서 19세로 등급을 정한다고 19세 이상인 사람만 보는 것도 아니고, 나이만 19세 이상이지 정신은 미숙한 사람이 그런 미디어를 접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도 있을 텐데. 좀 더 규제가 필요할지 않을까.
정말 마지막으로
누군가 차별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가장 강력하다 말했다. 나만 해도 지인 중 장애인도, 성 소수자도, 괴생명체도 없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다. 다만 그들은 수가 적을 뿐이고, 존재를 드러내고 싶어도 외면당하거나, 스스로를 숨겨야만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도 욕망은 있다. 그들도 욕망을 표출하고 이룰 권리가 있다. 이제는 그들의 욕망이 눈에 보이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