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과 현실이 겹쳐지는 순간, 도피할 곳을 잃어버린다.
매춘부의 아들이자 육손이로 태어난 두지. 여섯 번째 손가락이 잘리고 경극 학교에 들어간 순간부터 그의 인생에서 시투와 경극은 제외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혹독한 훈련 끝에 당대 최고의 경극 배우가 된 두지와 시투. 두지는 평생을 시투와 경극 공연을 하며 살길 바라는데 주샨이 등장하면서 두지와 시투의 사이는 어긋나기 시작하는데... 그저 시투와 경극 공연을 계속하고 싶은 두지의 소박한 소원은 과연 이뤄질 수 있을까?
아주 어렸을 때 패왕별희를 본 기억이 얼핏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패왕별희는 약간 판타지 영화였는데;; 유일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원형 경기장 같은 곳에서 경극 분장을 한 배우가 날아다니며 검을 휘두르고 사람을 죽이는 모습이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게 패왕별희가 맞는지도 의문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데이가 장 공공의 보검으로 누굴 죽이나 했는데 본인이었다. 데이가 뒤돌아선 패왕에게서 보검을 빼 들고, 쿵 소리와 함께 패왕이 뒤돌아보며 패왕 분장을 한 샬로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데 그 모습이 너무 괴기스러웠다. 샬로가 쓰러진 데이를 보고 데이!! 울부짖고 패왕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두지... 낮게 읊조렸는데 샬로가 웃고 있는 거 같아서 너무 기분이 나쁜 거. 옛날 영화다 보니 화질이 안 좋아서, 조명도 어둡고 하니 내가 잘 못 본 거겠지 했는데 진짜 미소 짓는 거였다니! 충격;;
두지가 인생에서 생애 처음으로 본인 의지로 선택한 일에 대한 존중(?) 이런 의미라는 해석이 있던데. 글쎄 나는 너무 소름이 끼쳤어. 샬로가 웃는 게 이제 데이에게서 벗어 날 수 있겠구나 이런 느낌이었다면 내가 영화를 잘 못 본 걸까...
현실과 극도 구분 못 하고 자기가 우희인 줄 알죠. 무대와 현실, 남녀의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그는 그러한 경지에...
기억력에 한계가 있을 테니 정확할진 모르겠으나, 데이와 샬로가 대비되는 인물이란 걸 보여주는 부분이 경극 분장이 아닐까 싶다. 샬로는 타인에게 분장을 받으며, 분장 중이거나 지우는 장면이 나온다. 특히 원대인이 집으로 초대하는 장면에선 실시간으로 분장을 지우고 의상까지 갈아입는다.
데이는 분장을 하는 중이거나 분장을 지우는 장면이 없다. 그나마 분장을 하는 장면이 있긴 한데 완벽히 분장된 얼굴에 입술만 덧칠하고 있어 '중'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우희의 분장이 흐트러진 장면은 모두 타의에 의해서다. 장 공공의 집에서 나올 때, 원대인의 집에서 나올 때, 자아비판으로 수모를 당했을 때. 데이는 우희가 된 이후로 자의로 우희를 그만두고 싶어 했던 적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지.
천카이거 감독이 어떤 의도로 연출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샬로는 패왕인 동시에 샬로인데 데이는 꼭 우희는 우희, 데이는 데이. 우회와 데이는 공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거 같았다.
특히나 원대인이 데이와 샬로를 집으로 초청하는 장면에서, 원대인, 극장 단원은 물론 환복까지 마친 샬로까지 모두가 문밖으로 나갔는데 데이는 문 앞에 가만히 서 있다. 나사장이 원대인에게 얘기한 '현실과 극을 구분하지 못하고 우희인 줄 아는' 데이의 모습을 잘 표현한 장면 같다. 사실 영화를 볼 때는 이 장면에서 별생각이 안 들었던 것 같은데 (아니, 홍등가를 간다는 샬로에게 매우 실망감을 느꼈을 거다) 후기를 작성하기 위해 이미지를 찾다 이 사진을 봤는데 문득 데이만 방안에 머무는 게, 꼭 데이만 현실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거 같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패왕은 우희를 사랑하지 않은 거 같아서 슬퍼.
우리가 별희를 처음 연기했던 곳이 어디인지 기억나?
기억력이 좋은 건 너야
어제도 다녀왔어
그 칼을 찾으러?
이 장면이 나올 때, 샬로가 일부러 모른 척을 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장 공공 집에서 데이에게 일어났던 일은 샬로에게도 좋은 추억이 아닐 테니까. 기억력이 좋은 건 너라면서 어제도 갔다 왔다니까 칼을 찾는 거냐며 바로 아는 체를 했잖아. 데이가 원대인에게 보검을 받아 왔을 때도 흐트러진 데이의 꼴을 보고 비꼬는 거로 생각했다. 자아비판 장면에서도 데이를 고발하며 원대인의 이야기를 할 때도 정말 데이를 고발하는 게 아니라 원대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데이를 원망하는 마음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자살하는 데이를 보고 웃는 샬로를 보고 나서는 아, 패왕 새끼 그냥 개쓰레기네. 오프닝에서도 두 사람이 얼마 만에 함께 공연을 하는지, 얼마 만에 재회를 한 건지 패왕은 제대로 기억하는 게 없었다. 경극 학교에서 다들 대사를 틀려 혼이 날 때도 완벽하게 대사를 외우던 패왕이 21년, 10년... 말할 때마다 틀려서 내가 다 섭섭했다.
그런데 또 마냥 샬로를 비난할 수도 없지... 정말 하루아침에 권력의 중심이 변화는 사회에서 살아남으려던 일반 사람일 뿐이니까. 샬로가 주샨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도 데이를 아끼지 않았던 것도 아니고 그저 애정의 깊이가 달랐던 것 같다. 데이와 샬로 관계에서도, 주샨과 샬로 관계에서도 애정의 깊이가 달랐다는 게 슬프네. 사랑의 깊이가 다른 관계는 괴롭구나.
데이가 주인공인데도 자꾸 주샨에게 시선이 갔다. 눈도 가고 마음도 갔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던지고 맨발로 샬로에게 간 당찬, 원대인에게 데이의 보검을 보여주며 술수를 부리던 영특한, 남편이 도박에 빠져도 가정을 꾸려가는 생활력 하며 조금만 낌새가 이상해도 바로 눈치채고 샬로를 구하려 행동하던 여자가 고작 사랑 때문에 목을 매달았다는 게 너무 아쉬웠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데. 고작 살고자 목숨 구걸을 위해 어릴 때부터 반평생을 함께한 동료와 아내를 버린 비겁한 남자 때문에 세상을 등지다니.
'개수작 부리면 똑같이 싸워야지'라고 말하던 패기 있던 패왕은 어디로 갔을까. 아니 그래 목숨은 하나뿐인 거니까. 자아비판 때 데이와 주샨을 배신한 거는 이해해. 살고자 하는 건 인간의 당연한 본능이겠지. 패왕이 가장 비겁하게 보였던 장면은 두 명의 우희가 나왔을 때다. 데이 엿 먹이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 샤오쓰긴 하지만 거기서 '네가 데이에게 말한다고 했잖아' 이딴 소리나 지껄이면서 샤오쓰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무대도 아무나 올라가 라며 책임감 없는 모습.... 정말 너무 실망스러웠고, 사람들 손을 거치고 거쳐 결국은 제 손으로 패왕의 모자를 씌워주던 우희... 가짜 패왕은 연기하러 무대에 올라가고 데이는 현실에 남았다. 반대 방향으로 걷는 패왕과 우희. 샬로와 데이가 가는 길이 다르단 걸 이렇게 또 보여주네.
이건 정말 지극히 개인적인 기대였는데, 내심 데이랑 주샨이 잘 되길 바랐다. 한 사람을 사랑했던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길 바라는 마음이 영화가 진행되면 될수록 계속 계속 들었다. 데이는 주샨을 매춘부라 비난하고 주샨은 데이 얼굴에 침을 뱉었지만 그래도 아편 금연 증상으로 괴로워하던 데이를 안아주고 패왕에게 버림받은 우희를 위로해주고 패왕이 불에 내던진 보검을 불에서 건져내 데이에게 건네주던 주샨을 보면서 헛된 마음을 품었습니다... 데이에게 보검이 얼마나 소중한지 샬로보다 주샨이 더 잘 안다면 데이와 샬로의 관계는 이미 끝난 거 아닌가요?
아니 그냥 최소한 두 사람의 끝이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도 죽음이 아니라 샬로를 떠나 삶의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데이에게 우희는 도피처가 아니었을까. 현실에서는 샬로에게 사랑받을 수 없으니 패왕별희라는 극 통해 우희가 되어 패왕을 연기하는 샬로에게서라도 사랑받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현실과 극을 구분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그저 극에서만 살고 싶었던 건 아닐는지. 그렇기에 더는 힘들어 못하겠다는 패왕의 말에, 본디 사내아이로 운을 띄운 패왕의 말에, 데이의 극과 현실이 겹쳐지는 순간 영원한 도피처를 찾은 것은 아닐지.
두 남자의 사랑과 질투, 그리고 경극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이야기!
패왕별희 팸플릿 속 문구인데 정말 하나도 공감되지 않았다. 나에게 패왕별희는 두 남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이야기였고(혹시나 오해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데이를 여자로 칭하는 게 아니라 주샨과 데이를 말하는 거다), 학대에 가까운 체벌과 훈련 과정은 묵인되고 결과물인 공연만을 보고 경극을 아름답다 표현하는 점도 동의하기 어려웠다. 특히나 경극 학교에서 도망쳐 나온 뒤 패왕별희 무대를 보면서 얼마나 맞았으면 저렇게 멋있게 연기할 수 있냐 말하며 울던 샤오라이즈를 봤잖아. 두지가 매 맞는 모습을 보면서 샤오라이즈가 빙탕후루를 꾸역꾸역 먹었을 때, 저렇게 먹다 목메 죽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아이는 스스로 목매달아 죽었다.
다 큰 성인 남자 둘이 노인 앞에 무릎을 꿇고 매질을 당한다. 데이와 샬로가 물론 잘못한 점이 있으니 스승이 혼을 내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스승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훈육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 당한 학대로 학습된 체념은 아닌지 의문이다.
17세 관람가 나와야 한다.
영화 초반 체벌 장면이 아무리 옛날 영화이고, 배경이 옛날이라고 해도 아동학대고 패왕별희 첫 공연 날 장 공공 장면도 너무 성매매. 이런 영화가 초등학생도 부모와 함께라면 볼 수 있다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특히나 집이면 시청 지도가 가능할 수 있을 수도 있지... 부연 설명이라든지... 근데 극장에선 사실 시청 지도를 어떻게 해. 17세 관람가 도입이 시급하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3시간에 달하는 상영 시간은 아무리 대본이나 연출이 좋아도 지루하지 않기 힘들다. 특히 나는 집중력이 좋은 편도 아니고 영화를 보면서 생각을 많이 하는 편이라 영화 내용은 물론 시간에 대해서도 자꾸 지금 삼십 분쯤 지났나? 이 정도면 반 정도 진행된 건가? 이런 생각을 한단 말이지. 근데 패왕별희는 긴 상영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이 덜 했다. 사건이 많기도 했고, 배경음악이 등장인물의 불안한 미래를 예견하듯 긴장감 있게 사건 발생 직전부터 분위기를 조성해서 지루함을 느낄 틈을 주지 않았다. 후반부에는 세 명의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이며 배경음악이며 너무 불안해서 계속 가슴 졸이며 보느라 심적으로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