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만화 Part. 1

의식의 흐름 주의

by 에바

동네에 두세 군데씩 만화방이 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슈퍼 주인만큼이나 만화방 주인은 아이들의 흔한 바람이었는데, 종일 공짜로 만화책을 보면서 돈도 벌다니 이보다 부러운 직업이 있을 수 없었다. 방과 후에 친구들과 삼삼오오 몰려가서 신간은 나왔는지 새로 볼만한 만화는 무엇이 있는지 만화방 책장을 둘러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요즘 아이들이 (어른도 마찬가지겠지만) 넷플릭스에서 뭘 볼지 한 시간 동안 누워서 고민한다면 그때는 만화방 책장 앞에 서서 한 시간을 고민하는 거다. 새삼 체력도 좋았네.


언제부터인지 만화방이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자연스레 만화책과 멀어졌다. 아예 안 읽은 건 아니지만 일단 만화방이 사라지면서 만화책을 읽으려면 구매를 해야 하는데 매번 사서 읽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다. 용돈이 그리 넉넉한 청소년이 아니었거든(눙물).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만화책보다 웹툰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24/7, 365일 만화를 손에 들고 다니는 거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핸드폰과 인터넷만 있으면 언제든지 볼 수 있다. 마감에 칼 같은 작가의 웹툰을 보고 있다면 일주일에 한 번 일정한 시간에 꼬박꼬박 업로드된다. 심지어 주 2회 연재를 하는 작가들 있다. 인간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댓글을 통해 같은 만화를 보는 다른 독자의 실시간 감상을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웹툰에는 선듯 손이 가지 않았다.

뭐랄까, 만화책이 주는 설렘이 없다. 매일 만화방에 가서 '아저씨 <궁> 신권 나왔어요?' 묻는 감질맛이 없다. 만화방 아저씨랑 친해져서 나를 위해 신간을 꿍쳐 놓는 짜릿함이 없다. 만화를 보기 위해 수고롭게 만화방이든 서점이든 움직여야 했고, 만화책 가격이 오르고 그에 따라 만화 대여비가 오르는 것을 보며 어린 나이에 물가 상승을 몸소 체험하고 만화책 특유의 갱지 냄새가 시각과 촉각과 더불어 후각을 자극하며 신간을 보는 것이 꿈이 아니란 사실을 증명해주는 맛이 없다. 간혹 부록으로 있던 올 컬러 페이지의 감동과 간혹 찢긴 페이지를 마주하는 처참함.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오른손의 얇아지는 두께감을 느끼며 다음 권은 또 어떻게 기다리나 걱정하는 애타는 마음이 없다. 요즘은 만화를 책으로 그리던 작가들도 웹툰으로 많이 넘어왔고, 나도 만화책 대신 웹툰을 보지만 여전히 미끌미끌한 종이에 인쇄된 올 컬러 단행본은 여전히 낯설다.


만화를 꽤 좋아하고 많이 본 거 같은데 생각보다 완결까지 다 읽은 만화는 많지 않은 것 같다. 만화방이 사라지면서 강제 연재 중단된 것처럼 읽지 못한 만화도 많고. 취향도 꽤 까다로운 편이라 그림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무리 재밌다고 소문나도 읽지 않기도 했고. 정말 좋아하는 작가의 만화만 손꼽아 본 것 같다. 용돈이 풍족한 편이 아니라 닥치는 대로 빌려 볼 수는 없었기에. 동네에 시간제 요금이 있는 만화방이 있기도 했지만 어린 만큼 읽는 속도가 느려서 나에겐 적합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만화책은 한 번 빌리면 적어도 3번은 읽어줘야 했다. 첫 번째 읽을 때는 스토리 진행을 보기 위해 글 위주로 빠르게 내용을 훑고, 두 번째는 인물의 표정과 행동 위주로 그림을 쫘라락 보고, 세 번째는 감명 깊었던 부분 위주로 복습. 그래야 서나 달 뒤에 신간이 나와도 전 내용을 어느 정도 기억할 수 있었다.


책이나 영화를 보다 마음에 드는 대사나 문장을 필사하는 습관도 한참 만화책을 읽던 무렵 생겼다. 만화책 대사를 빼곡히 필사하던 노트가 따로 있었다. 노트는 찾을 수 없었지만 언젠가 심심했던 내가 노트 내용을 옮긴 게시물은 찾을 수 있었다.


어제 지만이를 만났다.
지만이는 달라지지 않았으나,
너무도 달라져 있었다.
이 말의 뜻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리라...
나조차 이해하지 못하므로...


<나는 사슴이다>는 초등학생이 이해하기에는 좀 어려웠던 거 같다. 실제로 위에 문장을 노트에 적으면서도 리아가 말장난을 하는 건가?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도 같다. 리아의 시간은 멈췄는데 나의 시간은 멈추지 않아서 어느새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리아의 말이 어느 정도 이해할 정도로 어른이 되어 버렸다. 문득문득 이런 식으로 나이를 실감한다. 처음 볼 때는 언니 오빠였다가 어느 순간 또래가 되고 종국에는 나만 나이를 먹는다. 서글프네. 만화를 보는 동안 우리는 같은 꿈을 꾸고 같은 모험을 했는데 갑자기 시공간 이동물이 되었는지 나만 현실에 뚝 떨어진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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