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잘래? 같이 살래? 애 낳을래?
내 뒷자리 과장님이 본인의 연애 철학이라며 후배에게 한 말
내가 다니는 회사는 계열사 5개가 한 건물 안에서 7개 층을 함께 쓰고, 층수와 좌석 상관없이 어디서든 앉아서 일할 수 있는 자율좌석제를 운영한다.
자율좌석제라 전날 앉았던 자리가 리셋되어 아침마다 오늘 앉을자리를 선택해야 하긴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본인이 앉는 자리에 계속 앉는다. 그렇기에 우리 조직이 이 공간에서 일한 지 1년이 좀 넘었기도 하고, 책상 옆에는 디지털 명함이 착석과 동시에 노출되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 인사만 안 했지 대충은 누가 어디 회사 누구인지 안다.
내가 주로 앉는 16층은 크게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고시원 느낌으로 칸막이가 쳐있고 각 테이블마다 모니터가 붙어있는 업무몰입구역이고, 나머지 하나는 커피머신에 노래도 흘러나오며 편한 좌석이 있는 라운지다.
나는 업무몰입구역보다 적당한 소음에 밖도 보이는 라운지에서 근무한다. 라운지는 나처럼 바깥쪽을 보고 배치된 높은 테이블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절반이고, 높은 테이블을 사이드로 두고 가운데 구역에 배치된 편한 좌석에서 커피 한 잔 하며 동료와 대화를 하는 사람들이 절반이다.
여느 때처럼 라운지에서 밖을 보며 일하던 어느 오후, 내 뒤쪽 테이블에서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잠깐의 통화 나 계속 흘러나오는 bgm은 업무에 지장이 없지만 이렇게 각 잡고 얘기가 길어진다 싶을 땐 바로 이어폰을 꽂는데, 그날따라 이어폰을 가져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의 대화에 청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곤 꽤나 큰 충격을 받았다.
두 사람은 같은 팀 선후배였고, 대화의 주제는 선배로 보이는 미혼 남자 A가 후배로 보이는 미혼 남자 B에게 본인의 연애 철학을 공유하며 연애를 하라는 조언이었다. 이렇게만 설명하면 업무 조언 외에도 애정을 갖고 후배의 연애까지 걱정해 주는 사려 깊은 선배와 경청의 자세를 가진 후배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내용은 전혀 딴판이었다.
아래는 두 남자의 대화를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이다.
A: 나는 너무 회사 생활이 바쁘고 하니 못 하고 있지만, B는 아직 신입이기도 하고 내가 업체 사람들 소개도 해주고, 옆팀 회의도 자주 데리고 다니고 했으니 적극적으로 대시해 봐!
B: 저도 좀 바쁘기도 하고.. 사실 전 여자들이 좀 어려워요.
A: 아 그치. 여자들이 좀 피곤하긴 하지. 이렇게 하면 그 의도가 아니다, 저렇게 하면 왜 이렇게는 못해주냐. 어디에 장단을 맞춰야 할지 모르겠어. 근데 말야, 사실 여자들이 까탈스러운 척하면서 튕기지만 다 남자들이 리드해 주는 걸 좋아해.
B: 아 그런가요.
A: 그렇다니까! 그러니 B도 먼저 가서 번호도 물어보고 해.
B: 알겠어요, 과장님. 그럼 한번 용기 내볼게요.
A: 잘 생각했어. 아 피곤하다, 진짜. 연애고 썸이고. 나는 재고 따지고 간 보고 이런 거 없이 진짜 여자랑 관계가 딱 이 세 마디로 끝났음 좋겠어. 나랑 잘래? 같이 살래? 애 낳을래?
갑자기 누군가 그들을 불러 둘의 대화는 A의 충격적인 마지막 발언을 끝으로 급하게 중단되었다. 대체 누구길래 회사에서 동료에게 이런 말을 하지? 하고 고개를 돌려 확인한 결과 두 명의 화자는 항상 업무몰입구역 프린터기 앞에 앉아 일하는 옆 회사 투자팀 직원들이었다. A는 과장님, B는 사원.
같은 층에 앉아 근무해도 딱히 옆 회사랑 협업하지 않는 한 아는 거라곤 책상 위 디지털 명함에 적힌 회사명, 팀명, 직책, 가끔씩 왔다 갔다 할 때마다 보이는 근무 태도 정도이다.
사실 초보 수준의 재무회계 지식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회사 투자팀을 공시자료 작성하고 IR을 준비도 하는 문과생들 중 top class라는 선망의 대상으로 보아왔고, 다량의 출력을 해야 하여 프린터기 앞에 장시간 체류할 때 그들의 좌석으로부터 들려오는 각종 전문 용어들은 그분들을 내 머릿속에 일 잘하는 열혈 직원들로 포지셔닝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전 회사를 다닐 때는 지금보다 어려서 중매에 관심이 많기도 했고 직장 동료들과 내 지인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일이 자주 있었기에 만약 예전 같았으면, 그리고 만약 같은 회사여서 말문만 텄더라면 대기업, 좋은 팀, 과장님이란 직책처럼 겉보기에 번지르르한 타이틀을 가진 투자팀 A과장님은 높은 확률로 내 지인들을 소개해주는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A과장님과 후배분의 대화로 볼 때 단순히 일 잘한다, 똑똑하다 수준의 표면적인 요소들 위주로 내린 평가만으로 그 사람이 사실 어떤 연애 철학을 가졌는지, 이성관이 어떤지 등은 전혀 모른 채 내 소중한 지인들에게 소개팅 자리를 제안해 왔던 건 정말 위험한 행위였다.
돌이켜보면 내가 회사 생활을 하며 멋지다고 판단했던 이전 회사 과장님들 10명 이상과 대학 후배, 대학원 동기, 동아리 친구 등 내 지인들을 매칭했지만 성사율은 누적 0%인데, 그 이유가 물론 지인들이 모두 눈이 매우 높아서였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알고 보면 인성까지는 검증되지 않은 회사 사람들을 소개팅 자리에 내보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는 이전 회사대비 사람들과 업무 외적주제로는 티타임을 덜 갖기도 하고, 나이가 좀 더 든 만큼 나도 내 지인들도 결혼을 준비 중이거나 이미 결혼을 한 경우가 많기에 소개팅 이야기는 잘 꺼내지 않지만, A과장님의 사례를 통해 더더욱 앞으로는 회사 사람들과 지인 간의 연결 제안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물론 A과장님이 여성 혐오자인 것도 아니고 조금 과격한 연애 사상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본인이 친한 후배에게 이야기하는 내용이 우연히 옆 회사 근무자인 내 귀에 흘러들어온 것일 뿐이라고 상황을 축소해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A과장님, 아무리 노래가 나오고 티타임 자리가 있는 라운지라 해도 회사는 회사고 절반의 근무자는 일을 하고 있다구요. 지극히 사적인 본인 생각은 친구들에게나 하거나 블라인드에 적읍시다. 그리고 일 할 때만 얕게 아는 회사 선배들을 지인들에게 소개해주는 과거의 저 같은 분들이시여, 우리 앞으론 섣불리 그러지 맙시다. 소중한 내 지인들과의 관계 오래오래 좋게 가져가려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