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째 인도네시아의 족자카르타에서 거주 중이다. 한국인들은 대부분 이 도시를 족자카르타 혹은 족자라고 부른다. 언어와 명칭은 변하기도 하기에 그 기원과 바른 사용에 대해서는 입장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익숙함 때문인지 많은 이들은 이 도시의 공식적 이름인 욕야카르타(Yogyakarta), 혹은 욕야(Yogya)보다 족자(Jogja)를 더 많이 사용한다.
이슬람 세가 강한 곳에서는 술탄국들이 세워지곤 했다. 인도의 영향으로 불교-힌두 왕국들이 주로 세워졌던 인도네시아 군도에 아라비아와 인도, 혹은 오토만 제국 등과의 무역의 영향으로 이슬람이 전래되었으며, 이후 여러 술탄국들이 세워졌는데 네덜란드와의 독립전쟁을 거치면서도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술탄국이 바로 족자카르타 술탄국이었다. 하멩꾸부워노(Hamengkubuwono) 10세가 현재의 술탄인데 그의 아버지인 하엥꾸부워노 9세는 네덜란드와의 독립전쟁에 참여하는 동안, 현대 인도네시아 건국의 아버지인 수카르노에게 자신의 술탄국의 자치권을 요구한다. 족자카르타 술탄국은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독립을 위해 싸웠고 공화국 속 술탄국의 지위를 유지하게 된다. 법률상의 문제로 술탄국이 아닌 족자카르타 특별주로 불려지고 술탄은 주지사로 되어 있지만 이 주의 관료 임명권은 술탄에게 있으며 술탄이자 주지사로서의 직은 세습된다. 특별히 하멩꾸부워노 9세의 경우 독립영웅이자 인도네시아의 부통령을 지냈던 인물로 인도네시아 국민들과 족자카르타 주민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던 인물이다. 인도네시아의 2대 대통령이자 두 번째 독재자였던 수하르토 역시 그가 정치적 동반자로 함께 있어주길 간절히 원했지만, 그의 독재에 동의할 수 없었던 족자의 술탄은 1978년도의 반둥공대 학생시위에 수하르토가 군대를 보낸 일을 계기로 부통령 지명을 거절했다.
지금도 족자카르타는 자바의 정신적, 문화적 수도의 역할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슬람세가 강한 지역임에도 다른 종교에 대한 관용을 중시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독립전쟁 시 세워진 인도네시아 최초의 국립대학인 가자마다 대학교(Universitas Gadjah Mada)를 비롯해서 고등교육기관과 연구센터들이 밀집되어 있으며 인도네시아 국가, 정치철학의 핵심인 빤짜실라(Pancasila)가 중요하게 연구되는 도시이기도 하다. 세계적인 대승불교 사원인 보로부두르(Borbudur)와 거대한 힌두사원인 쁘람바난(Prambanan) 사원이 도시의 북서쪽과 북동쪽에 각각 자리를 잡고서 과거 마타람 제국의 영광을 과시하고 있기도 하다.
독재자 수하르토가 물러난 이후, 2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국가의 안정을 위해 정부가 눌러놓았던 이슬람 주의가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특히 기독교세가 강한 중부 슐라웨시의 Poso와 말루쿠의 Ambon 등에서는 대규모 폭력사태가 발생해서 수백 명의 사상자와 훨씬 더 많은 수의 난민들이 발생했다. 기독교를 비롯한 소수종교와 이를 믿는 종족들 그리고 인도네시아 정부뿐 아니라 온건파로 알려진 주류 무슬림 사회에서도 이를 우려의 눈길로 바라보며 해결책을 찾고 있는 중이다. ISIS멤버는 최근 800명 정도까지 늘어난 것으로 확인되며 Poso지역의 무자헤딘은 여전히 위협적이다. 파푸아 지역의 독립을 주장하는 기독교 측 지도자들은 벌써 두 번째 살해를 당했다. 만만치 않은 갈등과 폭력의 가능성이 비교적 평온한 국가 안에도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2006년 10월, 술탄이 졸업한 학교이자 국립대학인 가자마다 대학, 이슬람 국립대학인 수난 깔리자가 대학, 그리고 개신교 사립대학인 두따 와짜나 대학 관계자들이 술탄 궁에 모여 술탄이 참석한 가운데 MoU를 맺었다. 그리고 Indonesian Consortium for Religious Studies(ICRS)라는 연구기관을 만들었다. 가자마다대학 내에는 박사과정을 만들어 오직 종교 간 관계에 대해서만 연구하기 시작했다. 세속국가를 표방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무슬림이 살고 있는 인도네시아, 그중에서도 술탄국 안에서 연구하는 종교 간 관계이기 때문에 국제적인 관심이 크고 올해 QS대학랭킹에서 이 과정은 종교학 및 신학 분야 세계 47위에 랭크됐다.
학기가 끝나가는 시점에 학생 세미나를 열기로 했다. 살라띠가라는 도시다. 가자마다 대학의 석사과정과 박사과정, 기독교 대학인 사띠와 와짜나 대학의 석사과정, 이슬람 대학인 수난 깔리자가 대학의 석사과정생들이 사띠아 와짜나가 위치한 살라띠가의 한 조글로 식당에 모여서 종교적 관용과 갈등, 테러 등에 대해서 한 학기 동안 수업한 것을 간단히 발표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이제 막 입학한 학기였기 때문에 모르는 내용들이 많아 그저 구경 가는 기분으로 살라띠가로 향했다. 교수님들이 가족을 데리고 와도 좋다고 해서 차량을 렌트해서 2시간 거리인 살라띠가로 향했다.
가는 길이 좋았다. 족자를 벗어나기 전 길가에 있는 힌두사원과 불교사원이 혼재된 플라오산 사원을 지나고 시골 동네를 지났다. 므라삐 화산과 머르바부 산이 바라보이는 고속도로를 달려 살라띠가(Salatiga)에 들어갔다. 도로에 인도가 있는 것을 보고 아내가 깜짝 놀랐다. 늘 차도 옆을 아슬아슬하게 지나다녀야 했는데 인도가 있는 도로를 보면서 이곳은 살만할 것 같다는 꼭 농담 같지는 않은 농담을 했다. 세미나는 조글로 식당을 하나 빌려서 진행했는데 식사와 간식이 준비되어 있었고 커피만 각자 주문하는 방식이었다. 한잔에 한화로 천 원 정도 하는 가격이었기 때문에 쉬는 시간마다 이곳학생들과 커피를 같이 마시며 인사를 나눴다. 특히 암본이나 포소에서 온, 종교분쟁 때문에 난민이 된 경험을 가진 친구들에게 관심이 갔다. 발제를 하는 동안에도 그 깊은 상처와 트라우마가 느껴졌다. 기독교 지역의 경찰들은 무슬림을 향해 총을 쏘고 이슬람 지역에서 파견된 군대는 기독교도를 향해 총을 쏘았다. 무자헤딘은 기독교인 청소년을 참수하기도 했고, 많은 집들이 불에 탈 때, 불난 집에서 뛰쳐나오는 이들은 다시 폭력과 살해에 노출됐다. 그걸 겪거나 듣고 자란 학생들은 그 상황과 원인, 해법에 대해서 발표하는 동안 감정조절이 쉽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자바 전통 양식의 가옥형태인 조글로로 지어진 식당에서 무슬림과 기독교인이 섞여서 토론을 하면서도종교적 긴장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이는 다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각자의 자리에서 연구하고 있는 학생들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7-8시간 동안 쉬지 않고 진행되던 세미나가 끝나고 나는 아이들과 아내를 데리고 호텔로 향했다. 학생들은 족자카르타로 돌아가면서 계속 문자를 보냈다. 가는 길에 분위기 좋은 커피숍에 들렀으니 오라는 것이다. 이미 지칠 대로 지쳐있던 터라 호텔로 들어가 쉬다가 지인을 만나 저녁식사를 했다. 다음날 일어나서는 살라띠가의 전통시장도 가고 커피도 마시며 도시 구경을 하고 족자로 돌아갔다. 커피를 마시면서도 아내는 인도가 있는 이 도시에 대한 칭찬을 멈추지 않았다.
체크 아웃을 하면서 기드온 협회에서 나온 성경을 보았다. 보통은 꾸란도 있는데 묶었던 호텔엔 성경만 있었다. 요즘엔 다들 인터넷으로 책을 보고 성경 역시 인터넷이나 앱으로 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꼭 필요한 건지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막상 만나면 반갑다. 이런 일들을 하는 이들과의 연대감 같은 것들도 경험된다.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의견이 분분한 일들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할 경우도 있는데, 그럴 때는 그 유의미성에 대한 증언들이 큰 힘이 될 것이다. 읽지는 않았지만 뻐르잔지안 바루, 새 약속이라는 제목만 봐도 누군가에겐 힘이 되고 위로가 되기 때문에 성경을 비치해 두는 이들은 자기의 위치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한 것일 거다. 나의 일도 그렇길 바라는 것이 평범한 우리들의 바람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