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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ke Oct 01. 2021

여행지에서 아이의 팔이 빠졌다

Fukuoka

몇 년 전 일본과의 관계가 지금 같지는 않을 때 아이 둘을 데리고 후쿠오카로 여행을 한 적이 있다. 휴가는 이미 갔다 왔고 갑자기 생긴 기회로 떠나는 거라서 경비는 최소화하기로 했다. 호빵맨 뮤지엄을 방문하는 계획 외에는 시장 구경, 편의점 쇼핑이 일정의 전부였다.


마지막 날 밤 문제가 생겼다. 둘째 아이의 팔이 빠진 것이다. 보통은 어깨가 빠지는데 우리 아이는 팔꿈치가 빠진다. 여행 전 처음으로 팔꿈치가 빠졌을 때는 근처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달려갔다. 그날 응급실에서 듣기로는 팔꿈치는 잘못 끼면 뼈가 부러질 수 있으니 같은 일이 생겼을 때는 팔꿈치 뼈를 맞출 수 있는 병원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하필 가깝고도 먼 나라에서 그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즐겁게 보냈던 사흘의 기억은 이제 나의 머릿속에 끔찍했던 기억으로 바뀌어 저장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택시를 잡아타고 가까운 응급실로 데려가 달라고 했다. 앗, 기사분께서 영어단어를 못 알아듣는다. 아주 천천히 이머전시와 하스피틀 클리닉 등의 단어를 여러 버전과 발음으로 반복했다. 그렇게 택시를 잡고 5분 가까이 단어 설명만 하다가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난감함을 느끼던 찰나, 아내가 맞은편에 있던 소방서 건물을 발견했다. 일단 거기라도 빨리 가보자고 했다.


한국인들보다 영어울렁증이 심한 일본인들에게 이 위급성을 알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 역시나 둘째의 눈이 찢어져서 늦은 시간 병원에 갔을 때는 병원 직원분이 문도 안 열어주고 도망가버린 적도 있다.) 급하니 일단 소방서 1층에 설치된 비상전화를 집어 들었다. 역시나 두세 명이 전화를 돌려받으며 웅성웅성하다가 끊어 버렸다. 난 정말 무력한 가장이라는 자기 성찰의 순간을 맞았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런데 그 순간 중년의 소방대원 한 분이 급하게 뛰어 내려왔다. 다른 직원들도 그분을 따라 같이 뛰어 내려왔다.


그 젠틀한 중년의 소방대원은 비교적 유창한 영어로 아이의 상태를 물었다. 나는 한국에서 이런 일이 있었을 때 아무나 쉽게 맞출 수 있는 부위는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정보를 전해 주었다. 그분은 자기가 지금 이곳의 책임자라며 우리를 안심시키고는 걱정 말고 구급차에 타서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곤 계속 어딘가로 전화를 하면서 차에 올랐다. 그분이 출발을 외치자 한 대원이 일사불란하게 도로를 통제하고 운전대원은 사이렌을 울리며 빠르게 병원을 향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늦은 시간이기에 팔꿈치 뼈를 맞출 수 있는 병원을 수배하느라 5군데 정도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그리고 치료가 가능한 병원으로 우리를 안내한 것이다. 의사분과의 의사소통이 혹시라도 어려울까 봐 치료하는 동안 옆에서 같이 설명해 주고 기다려 주었다. 치료가 끝나고 너무 감사해서, 혹시라도 사례를 할 수 있는지 방법을 묻자 자신들은 소방관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는 인사를 나누고 떠나셨다.


오늘날 우리는 일본을 적국으로 간주한다. 나 또한 초밥과 라멘은 좋아하지만, 뼛속까지 심긴 그 반일감정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우리의 핏속을 그렇게 절절히 흘러 내려오는 감정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분 생각만 하면 아직까지도 눈물이 날 정도로 감사하다. 하나님께서 그날 우리 가족을 위해 천사를 보내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나의 둘째가 두 번째로 팔이 빠진 날 경험했던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난, 원수를 사랑해야 할 분명한 이유를 문자 자체가 아닌 삶의 자리를 통해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날 유일하게 걱정 없이 혼자 맑았던 아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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