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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ke Oct 23. 2021

인도네시아의 정치이념: 판차실라(Pancasila)

고조선의 홍익인간처럼 근대 인도네시아의 건국이념에 해당되는 것이 바로 판차실라이다. 발음은 빤짜실라에 가깝다. 다섯 가지 원칙이라는 뜻으로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인 수카르노가 건국을 준비하면서 내건 모토이다. 


인도네시아에는 보통 국제학교와 로컬학교 그 중간쯤 내셔널 플러스라는 학교가 있는데 한국분들은 대부분 자카르타에 있는 한국국제학교나 싱가포를 포함한 영어권 국가 국제학교에 자녀들을 입학시킨다. 국제학교는 학비가 많이 비싸기 때문에 딸아이를 내셔널 플러스로 운영되는 개신교 미션스쿨에 보냈었다. 내셔널 플러스의 경우 몇 가지 수업은 영어로 진행하는데 사회과목 같은 경우는 인도네시아어로 진행되고 인도네시아어로 뭘 외워가야 하는 것도 참 많다. 우리 어렸을 때처럼 국기게양식도 하고 제식훈련도 하고 대통령과 부통령 사진도 어딜 가나 붙어있고 아직 권위주의적 통치방식이 남은 모습이다. 판차실라도 그런 차원에서 열심히 외우고 발표시키는 것 같다.  딸아이가 처음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도 그렇게 판차실라를 열심히 외우고 발표 연습을 하느라고 우리 부부도 같이 외워버릴 정도였다.


나에겐 그 첫 번째가 참 인상적이었는데  "Ketuhanan yang Maha Esa" 바로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인도네시아어로 기록된 기독교의 성경을 봐도 하나님을 "Allah"라고 번역하곤 하는데 알라에 대한 신앙이 아닌 보편적 하나님, 그것도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국가이념으로 집어넣은 것이 참 신기했다.


역사를 좀 살펴보니 일본의 침입으로 네덜란드의 지배가 끝나고, 역시나 일본의 패망으로 이제 인도네시아가 독립을 앞두게 되었다. 그러나 외적으로는 네덜란드를 비롯한 서구 열강과 일본이 계속해서 인도네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내적으로는 민족주의자와 이슬람주의자, 모더니스트와 공산주의자 등이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위기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혼란 가운데 극단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은 지금의 아체지역처럼 샤리아법으로 통치되는 나라를 만들려고 했지만 수카르노를 비롯한 정치 엘리트들은 서구세계에 향료 제도로 알려진 말루쿠 지역과 파푸아, 티모르, 플로레스 섬 등 기독교 지역의 분리독립을 막기 위해 정치적인 의미에서 이 첫 번째 문장을 가다듬었다.


재미있는 건,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작업과 함께 모든 인도네시아인들은 반드시 종교를 가져야만 하는 규정도 생겼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도네시아인들은 이슬람, 개신교, 가톨릭, 힌두교, 불교, 유교라는 여섯 가지의 종교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서 믿어야 하며 우리의 주민등록증에 해당하는 KTP에도 종교는 반드시 표기토록 되어 있다. 가톨릭, 개신교, 이슬람 같은 유일신교뿐 아니라 힌두교 등의 다신교도 인정하면서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이 문구가 종교보다는 정치적 상황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통합의 차원에서 보자면 판차실라는 참 괜찮은 모토라는 생각이 드는데 판차실라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많은 이슬람 신자를 보유한 인도네시아에서 기독교나 힌두교도들도 각자의 신앙을 지킬 수 있고 각 종교의 명절 또한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수백 개의 종족, 수백 개의 언어, 그리고 각각 다른 종교로 인해 생겨나는 엄청난 "차이"들을 판차실라라는 통치이념이 줄여주고 있는 것이다. 판차실라가 인도네시아의 정치인들과 국민들에게 지금도 존중받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의 엄밀성과는 별도로 실용성면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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