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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uke Sep 29. 2021

말레이시아의 시작, 믈라카(말라카)

Melaka


갑작스러운 여행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휴가 아닌 휴가를 갈 시간이 생겼다. 주중 닷새 정도 시간이 빈 것이다. 아내는 즉각적으로 호찌민을 거쳐 쿠알라룸푸르로 향하는 비행 편을 끊었다. 바빠지기 전에 여행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이미 아내 말에 토를 달 수 없는 삶을 살기 시작했기에 처음으로 동남아를 방문하게 되었다. 저렴한 항공권을 사기 위해 호찌민에 들르게 되었지만 호찌민에서 하루를 보내는 동안 시장이며 관공서 건물들을 둘러보고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도 들렀다던 식당에서 쌀국수를 먹고 좋은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며 썩 괜찮은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도착한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는 상당히 세련된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보거나 할 것이 없었다. 유명한 페트로나스 트윈타워도 방문하고 사람들이 많이 방문한다는 거리와 시장을 방문해 봤지만 말레이시아가 이렇게 잘 사는 곳인 줄 몰랐던 것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아무래도 이 도시에서 사나흘 머무는 것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내가 버스를 타고 아랫동네 믈라카에 가보자고 했다. 고속버스로 세 시간 정도 갔던 것 같은데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겠다. 정글을 뚫고 달리는 고속도로의 느낌도 좋았고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도 터미널이나 차량이 깨끗했기 때문에 큰 짜증을 느끼지는 않았었다. 그렇게 믈라카라는 오래된 도시에 도착하게 되었다.


말레이시아의 시작

사실 인도네시아에 살다 보니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나 국가의 개념이 우리가 갖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인도네시아어와 말레이시아어도 상당 부분 비슷한데 이는 말레이-인도네시아어가 사실 이 지역의 교역어로 오랜 기간 쓰여왔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만 해도 300개가 넘는 민족이 있고 한 민족 안에서도 언어는 여러 개로 나눠지기 때문에 수백 개의 언어가 존재한다. 이를 연결하는 것이 바로 바하사 인도네시아어라고 불리는 인도네시아어이다. 사실 말레이시아어와 상당히 흡사하기 때문에 지난번 대한민국의 대통령께서 말레이시아 방문 시 저녁 인사로 슬라맛 소레(Slamat Sore)라고 인사했다가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많이 비슷한 가운데서 다른 것이 바로 그 인사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관련된 일을 하는 보좌관들이 조금은 나이브하게 그 일을 처리하지 않았었다 싶다. 어쨌든 이 말을 쓰는 것은 우리 한국인들이 가진 것과는 다른 국가관을 이 지역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민족이라는 개념 아래 우리 모두가 하나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국가라는 개념이 우리보다는 분명히 약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믈라카라는 지역은 본격적으로 말레이시아가 국가의 형태를 갖추는 것에 일조한 지역이다. 소위 부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던 이들에게 말레이시아라는 국가 개념을 불어넣어 준 사건들을 시작하게 한 도시인 것이다.


사실상 현재의 말레이시아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국가 형태는 말라카 술탄국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못가 이 지역은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의 침략을 받게 되고 말레이시아는 1957년에야 영국으로부터 독립해서 1963년에야 말레이시아라는 국명을 갖게 되었다. 술탄국들의 연맹체 형태를 갖고 있지만 인도네시아와 마찬가지로 다른 종교도 가질 수 있는, 종교의 자유가 허락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Melaka(믈라카, 말라카)

서론이 길었지만 믈라카에서 아내와 나는 참 좋은 시간을 보냈다. 사람도 없고 할 일도 없었다. 그리고 우리가 머무르던 옛 도시 지역은 잠깐이면 돌 수 있는 크기였다. 오래된 교회들이 있었고 좁은 운하 곁으로 좋은 식당들과 카페들이 있어서 분위기 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유명한 예수회의 자비에르도 이 지역을 거쳐갔고 중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인 영국의 로버트 모리슨이 이곳에 영화 서원(영화 학당)을 세우고 이곳에서 중국어 성경을 발간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슬람과 가톨릭 개신교 모두에게 중요한 역사적 장소인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곳이 유명한 것은 향료 무역의 주요 항구였기 때문이다. 유럽 사람들은 동방의 향료를 너무나도 사랑했다. 아랍과 이탈리아의 상인들을 통해서 인도로부터 들여오던 향료 무역은 오스만 제국이 중동을 장악하면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중동을 장악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으로 인해 유럽의 대항해시대는 시작되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향료를 찾기 위해 인도로의 항해를 시작했고 교황의 중재를 통해 스페인은 대서양으로 포르투갈은 희망봉으로의 항해를 통해 향신료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포르투갈이 풍랑을 만나 잠깐 브라질 해안에 닿아서 브라질을 식민지화한 것을 제외하면 대항해시대를 통해 대서양의 아메리카 대륙은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희망봉을 경유한 지역에는 포르투갈의 영향력이 강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포르투갈 상인들이 인도에 도착해보니 사실 후추와 정향(clove), 육두구(nutmeg)등의 인기 향신료는 인도의 동쪽이 원산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인도네시아 말루쿠주의 향료 제도는 그렇게 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포르투갈과 스페인 영국과 네덜란드가 각축전을 벌이면서 최종적으로 네덜란드가 지금의 인도네시아 지역을 영국이 지금의 말레이시아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향신료 무역의 주요 항구가 바로 믈라카인 것이다.  


술탄국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오래된 교회들, 그리고 그곳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 아기자기한 카페와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들, 운하를 항해하는 유람선들은 그렇게 이 작고 오래된 도시를 특별하게 만든다. 그 긴 역사의 질곡을 뒤로하고 편안하게 이곳에서 차를 마시며 밥을 먹고 산책을 하고 기념품 가게를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기억들을 만들 수 있는 기분 좋은 도시이다.  




기대

10년 동안 믈라카는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다. 물리적 거리가 한국에서보다는 훨씬 가까워졌지만 Covid-19로 인해 방문이 어려운 실정이기에 아쉬움이 크다. 그러나 다시 여행이 가능해지면 가보려고 한다. 10년 전엔 둘이 방문했었지만 이제 두 아이를 데리고 방문해야지 생각하고 있다. 단순한 여행으로 갔기에 관심 없이 넘겼던 많은 것들이 이젠 내 삶에서 더 중요해진 요소들이기 때문에 더 잘 보이리라. 둘이 보았던, 둘이 느꼈던 많은 것들을 넷이서 보게 된다면 더 행복하고 만족스러우리라 생각하면서 믈라카로의 여행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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