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중앙아시아의 거인' 카자흐스탄을 만나다
1부. 성장통 - 카자흐스탄 편.
<모든 성장에는 성장통이 있다. - 니체 - >
2장. '중앙아시아의 거인' 카자흐스탄을 만나다(2/5)
카자흐스탄은 '트리플 엑스 라지(XXX Large)' 사이즈!
알마티에서 심켄트까지는 기차로 이동했다. 국내선 항공편도 있긴 하지만 이번에는 기차 여행을 택했다. 일단 들고 온 짐도 너무 많았고 빨리 목적지로 가는 것도 좋지만, 이제 우리가 살아가야 할 곳이니 기왕이면 더 많이 경험하고 더 많은 것을 느껴보고 싶었다.
유라시아 대륙의 심장을 관통하는, 초원과 황야를 달리는 기차!
왠지 낭만이 더해질 것 같은 기차여행이 기대됐다.
해박한 지식인 싸샤는 새로운 것을 접할 때마다 이런저런 설명을 많이 해주었는데, 이번에 우리가 타고 갈 기차가 달리는 길은 중국과 시베리아까지 잇는 옛 실크로드를 따라 이어지는 길이라며 여러 이야기를 보탰다. 사실 세계사 문외한이었던 나는 관련 지식도 별 관심도 없던 터라 모든 관심은 오직 눈 호강에 집중됐다.
"그런데, 알마티에서 심켄트까지 기차로 몇 시간 걸리죠?"
"아, 얼마 안 걸려. 한 14시간 정도."
"네?"
14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그의 말에 머리가 '띵'해졌다. 무려 14시간! 그나마 다른 곳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긴 했다. 현재 수도인 북쪽 끝 아스타나까지는 20시간 거리라니... 국토 면적이 작고 대중교통이 잘 발달한 대한민국을 누리고 사는 한국인에겐 참 익숙하지 않은 시간이다. 하기야 여기는 그야말로 ‘사이즈’가 다르다. 카자흐스탄은 남한보다 27배 넓은 면적의 세계 9위 영토 대국, 트리플 라지 사이즈다!
카자흐스탄에서 '얼마 안 걸려'라는 말은 '생각보다 더 걸려'라고 번역해서 들어야 한다.
때 밀어주는 기차역?
알마티 기차역에 도착하니 역시 주요 대중교통이라 그런지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기차역 입구에는 'Казақстан темір жолы - 카자흐스탄 철도'라고 카자흐어로 크게 쓰여 있었다. '카자흐스탄 때미르 졸'이라고 읽는데, 마치 '카자흐스탄 때 밀어줘!'처럼 들려 살짝 웃음이 났다.
심켄트행 빛바랜 하늘색 낡은 기차. 어디서 많이 본 색깔이다 싶었는데 카자흐스탄 국기 바탕색이랑 똑같았다. 구소련 시절부터 지금까지 멈추지 않고 운행하고 있는 클래식한 기차였다.
"즈드라스트부이쩨Здравствуйте - 안녕하세요?"
항공 조종사 유니폼 비슷한 제복 차림을 한 우리 열차 칸 차장이 먼저 환영 인사를 건넸다. 몇 번을 들어도 어색한, 영어와는 확연히 다르게 혀가 '똘똘' 굴러가는 느낌의 러시아어 인사다. 아직은 그 인사가 입에 익지 않아 어색해서 살짝 웃으며 화답하고 차장에게 기차표를 건넸다.
"여권도 주세요!"
여권? 기차표를 구매할 때 여권이 필요했는데 타는 대도 여권이 필요했다.
여권은 누구에게든 함부로 보여주거나 넘겨주지 않도록 해. 그게 경찰일지라도!
싸샤가 어느 누구에게든 함부로 여권을 보여주거나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고 했던 기억이나 뒤 쪽에 서있는 싸샤를 쳐다보았다. 특별한 조언이 없는 걸로 봐선 괜찮다는 의미 같았다. 아무래도 육로로 국경을 넘나드는 사람들이 많아서 그런지 신원 확인 절차가 까다로웠다.
한 명씩 이름을 부르고 기차표와 여권을 대조, 확인했는데 받침이 어려운 내 이름만 유독 이상하게 불렀다.
"수... 순기르 부?"
허... 전혀 다른 발음으로 이름을 부르는데 살짝 당황스러웠다. 옆에 서 있던 아내는 웃으면서 좀 전의 상황을 상기시키듯 "순기르 부!" 하고 차장을 따라 했다. (기차표를 예매할 때 영문 이름 외에도 러시아어로 표기된 이름이 필요했는데, 그때 'Woo'라는 내 성을 들은 매표소 직원이 러시아어로 'Воо'라고 표기한 탓이었다. 한국 '성'이 너무 짧은 탓에 두 번이나 물어보고선 당황스러운지 살짝 웃으면서 들리는 대로 그렇게 적었다.)
그 이후로도 'o - 이응' 받침이 들어간 내 이름을 정확하게 불러주는 현지인이나 외국인은 아주 드물었다. 이제야 해외 교포들이나 일부 한국인들이 외국식 이름을 짓는 이유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나는 보수적인 환경에서 성장한 탓에 그런 외국식 이름을 쓰는 사람들에 대한 조금의 좋지 않은 쪽으로 편견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역시 세상에는 직접 겪어봐야 이해되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처음으로 나도 국제적으로 쉽게 통용될 만한 이름을 따로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 봤다. 기왕이면 아주 근사한 이름으로!
우리는 '쿠페 Coupe'라고 부르는 별도의 객실 문이 달린 4명 정원의 이등석 칸을 예약했다. 기차에서 1박을 하게 되는 셈인데, 다행히 침대칸이라 그리 불편할 것 같진 않았다. 일단 편히 발 뻗고 잠을 잘 수 있는 것만으로도 아주 만족스러웠다.
짐을 대충 정리하고 잠시 담소를 나누고 있는데 차장이 인원수에 맞게 베개, 침대보 그리고 담요를 가져다주고서는 내릴 때 반납하라고 했다. 제복 입은 사람이 가져다주니, 마치 군에서 보급품을 지급받는 기분이었다.
낯선 곳, 낯선 사람들과 밤샘 기차 여행.
이제 이곳에서 마주치고 겪게 될 모든 일은 '생애 처음'이란 수식어가 붙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신기하고 새롭고 또 기대됐다.
우리의 낭만은 내일을 이야기하는 것
기차 출발 후 어수선한 분위기가 정리되자, 우리와 편하게 대면해서 대화하기를 학수고대했던 싸샤와의 회의가 시작됐고, 그는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보따리 풀듯 하나둘씩 풀어냈다. 그동안 사업 준비를 위해 얼마나 열심히 발품을 팔고 돌아다녔는지, 현 상황 브리핑받듯 일방적으로 듣는 데만도 삼십 분 가까이 시간이 걸렸다. 이어서 진행 중인 일들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당장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함께 확인하고 움직여야 할 동선을 그려가다 보니, 새벽이 깊을 때까지 열띤 회의는 끝이 나지 않았다.
카자흐스탄은 한국과 -3시간 시차, 시계를 보니 벌써 한국은 새벽 동이 틀지도 모를 시간이었다. 시차와 여독으로 잠이 쏟아지고 집중은 잘 안 되었지만, 이 밤을 통째로 새 버릴 듯한 기세의 열정과 에너지 넘치는 싸샤의 모습에 안도감이 느껴졌다. 이제 우리는 하나. 우리 일이 곧 그의 일이고, 그의 일이 곧 우리 일이니까.
"많이 늦었고, 먼 길 오느라 피곤했을 테니까 이제 눈 좀 붙이고, 더 자세한 건 내일 얘기하자."
"그래요. 자세한 건 내일 계속..."
마침내 그의 입에서 나온 ‘내일’이란 단어는 마치 달달한 꿀처럼 느껴졌다. 오늘은 정말 누가 업어가도 모르게 잠이 들 것 같았다.
꿈을 꾼 듯했다.
기억하지 못했지만 잠이 깰 무렵 어렴풋한 꿈의 잔상이 느껴졌다.
다만 좋았던 것 같다.
눈부신 햇살이 머리맡 좁은 창으로 쏟아질 때
내 몸을 뉘었던 좁은 침대칸 하얀 침대보를 들치며 한 걸음 성큼 다가온 운명을 마주했다.
긴 여정이 될 것이다.
감히 그 끝을 짐작치 못하는 저 넓은 들판만큼 끝이 없는 그 긴 여정을 이제 시작한다.
여기, 심켄트에서.
잠깐 눈을 붙인 것 같은데 벌써 도착하는지 안내 방송에 ‘심켄트’라는 단어가 자주 들렸다. 어제의 말끔한 모습은 어디 가고 부스스한 행색을 한 차장이 객실을 돌면서, 어제 받았던 보급품을 반납하라고 독촉했다. 피곤한 몸을 일으켜 습관처럼 침대보와 담요를 ‘각’이 나오게 개고 있는데, 옆 칸에서 건너온 싸샤가 한마디 했다.
"그렇게까지 갤 필요는 없어. 그냥, 개수만 맞으면 돼."
"그래도..."
그때 처음 알았다. 몸에 익은 습관보다, 눈에 익은 습관이 더 강하다는 걸. 왠지 이렇게 모서리 ‘각’이 잡히지 않은 담요를 보는 건 용서가 안 되니...
에이, 모르겠다!
고이 접다 만 보급품들을 대충 둘둘 말아 반납하고, 객실로 돌아오는 길에 복도 칸에 서서 잠시 창밖 풍경을 보았다. 알마티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넓은 평원과 나지막한 언덕들 위에 듯 펼쳐진 낮은 집들 그리고 간간이 보이는 양 떼들...
9월 청명한 날, 마침내 우리의 홈그라운드에 도착했다.
심켄트Шымкент(러), Shymkent(영)
- '초원(잔디) 도시 Turf city'라는 뜻(광의로는 '거친(터프한) 도시')
- 카자흐스탄 제3의 도시, 무려 대한민국의 약 3.4배에 달하는 면적에 거주인구는 약 100만 명이다.
- AD 12c부터 인근 실크로드와 주요 카라반 사라이었으며, 주변 유목민들과 정착민들의 주요 무역 도시였다.
심켄트 - 카자흐스탄의 텍사스! (Texas - 미국의 28번째 주 - 카우보이 문화와 각종 사건사고로 유명한)
그야말로 그 도시 이름 뜻처럼 ‘터프 Turf’한 이 도시를, 현지인들은 또 다른 의미로 ‘카자흐스탄의 텍사스’라고 부른다. 그런데 그런 조금은 불명예스러운 별명은 카자흐스탄 현지인들만 부르는 게 아니라는 걸 후에 알게 됐다. 한 번은, 멀리 러시아에서 사업차 심켄트를 방문하신 분이 있었는데, 한식이 그립다며 우리 카페를 수소문해서 일부로 찾아오신 일이 있었다. 그분은 우리 부부에게 아주 반갑게 인사하시며, 어떻게 이 알려지지 않은 도시까지 오게 됐는지 궁금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덧붙인 그분의 격려와 진심 어린 걱정...
"아니, 이렇게 위험한 도시에... 어떻게 여기서 사업을 시작하셨어요? 심켄트가 구소련 시절부터 위험한 마피아
동네라고 소문나 있는 건 아시죠?... 총기, 총격사고가... 부디 무사히..."
"글쎄요... 우린 잘 모르겠는데요? 외려 우린 이 도시가 아주 안전한 것 같은데요?"
'카자흐스탄의 텍사스' 심켄트가 안방 같은 이방인은 아마도 우리밖에 없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