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사라진둥지 <1/2>
#위대한 비행 <존 - 날지 못하는 새>
나는 죽었다.
그게 옳았다.
빛과 어둠, 그 날카로운 경계.
이미 아름다운 것들과 공존할 수 없는 것들의 아름다운 조화...
'영혼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단다!'
어릴 때 할아버지가 했던 말이 섬광처럼 스쳤다.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영혼을 느낀다는 건. 그것도 아주 생생히!
이곳은 별까지 날아오른 새들 조차 상상할 수 없는 영혼의 세계가 분명했다.
모든 빛을 압도하는 빛 위의 빛!
그 찬란의 빛 가운데로 나는 급격히 빨려 들었다.
더 정확히는 그 빛의 중심까지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날아들었다.
'영혼은 날개가 없이도 날 수 있다니!'
그 깨달음의 순간, 신비한 빛이 폭발했다.
아! 자유!
내가 꿈꾼 비행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진공 같은 고요...
...
황금 깃털.
문득 황금 깃털이 생각났다.
1장. 사리진 둥지
'꿈인가?'
끊어진 기억들 중 몇 조각이 내게 돌아왔다. 그래 추락! 추락이었다. 나는 비행에 실패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오직 단 한 번의 비행! 그 추락과 함께 내 작은 꿈도 날개를 잃어버렸다.
'다신 날 수 없겠지...'
기억을 다시 휘저어 보지만 선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추락의 찰나, 그 끝이 정확히 어떻게 되었는지는 기억나질 않았다. 다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나는 그대로 날아 올라 외로운 별이 되었어야 했다. 그게 옳았다.
'끼이익!'
혼란스러운 마음이 파도일 듯 끝없이 밀려오다 어느 순간 눈이 떠졌다. 눈을 뜰 때의 느낌은 마치 낡은 둥지의 허술한 문을 여는 것 같았다. 아주 오랫동안 닫혀있었던 문. 마른 나뭇가지들이 마찰하며 삐그덕 대는 소리마저 들리는 것 같았다. 반쯤 열린 눈으로 한꺼번에 세상 모든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시력을 단번에 앗을 듯한 눈부심! 그것은 꿈에서 보았던 안내자, 그의 얼굴에서 뿜어져 나왔던 빛과 같은 아주 강렬한 빛이었다. 눈을 감으면 다시 어둠. 그리고 잠깐의 죽음. 눈을 뜨면 어둠보다 좀 더 긴 생명이 머물렀다. 그 둘은 마치 내 조그만 영혼을 두고 쟁탈전을 벌이는 듯했다. 죽음과 생명의 인터벌이었다. 그 인터벌 사이에 많은 생각과 꿈들을 오간 것 같은데 오로지 하나의 꿈만 선명하게 기억났다.
'황금 깃털...'
황금 깃털이 내 머리 위로 떠올랐다 바람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나를 휘감은 그 황금 깃털과 함께 나도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그 황금 깃털은 세 번이나 내 꿈에 나타났다. 먼저는 꿈에서 엄마를 만났을 때, 인공 날개 수술을 했을 때 그리고 이번에 안내자를 만났을 때. 그 세 꿈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내게 무엇인가 말해 주려 했던 것만은 확실했다.
◇◇◇
'아픔의 냄새...'
자극적인 소독제 냄새가 콧 속을 파고들었다.
천국엔 상처 치료용 소독제 같은 아픈 냄새가 존재할리 없다. 내가 다시 이 땅에서 눈을 떴다는 걸 처음 일깨워준 냄새였다. 얼굴에는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분명 아침 이리라 생각했다. 오후의 햇살이 부러워하는 생명의 기운. 빛의 기운에서 생기가 껴졌다. 태양의 부지런한 오름을 따라 좁은 창을 파고드는 눈부신 햇빛이 나를 깨움으로 재촉했다. 우연일까? 이번으로 두 번째. 지금 내가 뉘인 곳은 공교롭게도 어릴 때 눈을 떴던 바로 그 병실, 그 침대였다.
'훗. 다시 어릴 적 그 자리라니...'
◇◇◇
새들에겐 꿈이 있다.
땅과 바다의 끝까지 날아보고픈, 그래서 붉은 노을의 비밀까지 닿아보고픈, 솜털 같은 구름을 지나 하늘보다 더 높은 곳 - 가장 먼 별 - 까지 날아 보고픈. (모든 새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내 꿈은 진짜 '새'가 되는 것이었다.(웃기게도 나는 이미 새다. 최소한 '종의 구분'으로는.) 다만 내 꿈은 야망 넘치는 새들처럼 바다와 땅의 끝까지 멀리, 구름과 하늘의 끝까지 높이 날아 보는 게 아니었다. 내 바이올렛(제비꽃)처럼 작은 꿈은 야생화 만발한 우리 마을 오솔길 따라 아주 가까이서만 맡을 수 있는 꽃 향기조차 코 끝에 닿을 정도로 천천히 낮게 날아 보는 것이었다. 정말 그랬다. 저공비행! 가장 기초적인 비행 말이다. 날고 있다는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면 충분했다. 자유로이 나는 것! 새로서는 꿈같지도 않은 꿈. 그게 지금 내가 병실에 온몸에 붕대를 감고 누워있는 이유였다. 함부로 꾼 꿈의 대가였다.
◇◇◇
'까딱!'
내가 왼쪽 날개 끝 깃털을 움직였을 때 - 사실 '움직임'이란 표현으론 너무 크다 - 내 곁을 지키고 있던 - 아마도 기도 중이셨던 - 할머니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셨다. 신기했다. 할머니는 그토록 미세한 깃털의 떨림을 어떻게 느끼셨을까?
"존?"
고개를 움직일 순 없었지만 눈을 몇 번 깜빡여 할머니께 초점을 맞추었다.
"존, 정신이 드니! 여보, 여보! 존이 깨어났어요!"
"어디, 어디. 오, 주여! 존! 정신이 좀 드는 게냐? 하나님 감사합니다!"
창가 넓은 틀에 이제 갓 꽃 봉오리 진 화분을 내려놓고 계시던 할아버지가 내게 달려와 왼 날개를 꼭 잡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말을 할 수 없어 오른쪽 눈을 살짝 찡그렸다. 그게 두 분을 다시 보게 된 기쁨의 표시였다. 할머니는 눈물을 떨구셨다. 할머니는 원래 눈물이 많으신 분이다. 그래서 이 번만큼은 환하게 웃게 해드리고 싶었다. 그렇게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할아버지는 내 얼굴을 잠시 보시곤 얼른 고개를 돌리셨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어깨너머로 급히 돌아선 눈가에 무엇이 맺혔는지 알 수 있었다. 연신 날개로 얼굴을 몇 번이나 닦으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내가 아는 어느 누구보다 강인한 분이셨다. 눈물이 전혀 없을 줄 알았던 할아버지가 눈물을 훔치는 걸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존, 다시 이렇게 마주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구나..."
할머니의 '다시'란 말이 심장을 따스히 감쌌다. 그래 다시... 우린 다시 셋이 되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나,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셋이자 하나였다.
◇◇◇
하얀 벽과 잘 정돈된 몇 개의 침대.
처음 할아버지, 할머니를 뵌 것(정확히는 본 것을 기억하는 것)은 여기, 바로 이 병실이었다. 그때는 두 분이 지금 보단 훨씬 젊었었다. 비록 지금은 세월이 두 분의 이마에 귀여운 지렁이 주름을 수놓았지만! 아주 어렸을 때 처음 이 병원에 눈을 뜬 건 알에서 깬, 여전히 날개의 깃털이 부드러웠던 첫여름 길목이었다. 나, 할아버지 그리고 할머니. 아직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던 우리 셋을 하나로 묶어준 건 다름 아닌 지독한 폭풍우였다.
내가 태어난 해, 그 해 늦봄에는 유난히 때 이른 폭풍우가 잦았다.
어떤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비바람과 폭풍이 몰아쳤다. '스콜'이라 불리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변덕스러운 날씨! 그 시절의 나는 '스콜'이 하늘 신과 땅의 신이 싸우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건 아마도 엄마가 가끔씩 재미로 들려주었던 신화와 신들에 대한 이야기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쿠르르 쾅쾅!! 쏴아아!'
웬일인지 화가 난 하늘이 천둥과 번개가 번갈아 내며 땅을 마구 내리쳤다.
'아훗! 오늘은 더 싸움이 심한 것 같아요! 이러다 정말 온 마을이 다 떠내려 가겠어요!"
나는 소름 돋는 무시무시한 천둥소리와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성난 망치를 여러 갈래로 번쩍번쩍! 두들겨 대는 번개에 놀라 엄마의 품에 얼른 파고들었다.
"괜찮을 거야. 아가야. 하늘과 땅의 싸움은 길지 않단다. 언제 그랬냐는 듯 곧 화해할 거야."
"빨리 그랬으면 좋겠어요! 음... 그런데 서로 화해했는지는 어떻게 알 수 있죠?"
엄마는 막 쏟아지기 시작한 비에 내가 젖지 않도록 넓고 따스한 품속으로 더 끌어들이며 말했다.
"하늘과 땅은 화해의 표시로 서로를 잇는 예쁜 다리를 만든단다. 그게 바로 무지개지. 그래서 아름다운 형형색색 무지개는 '평화의 약속'이란 뜻이란다."
"아! 그럼 얼른 무지개가 떠올랐으면 좋겠어요."
"그러게 말이야. 외출 나간 아빠가 잘 돌아오실 수 있게 어서 이 비와 바람이 좀 잦아들었으면 좋겠구나."
그런데 그날의 폭풍우는 보통의 그것처럼 쉽사리 지나가지 않았다. 폭풍우는 낮부터 저녁까지 이어졌고, 밤이 늦도록 우리 둥지를 받치고 있는 큰 나무를 격렬하게 흔들었다.
"뽀지직!"
이따금 나무의 잔가지들이 부러져 바람과 같이 휘 날려갔다.
"엄마, 그런데 아빠는 왜 아직 돌아오시지 않는 거죠?"
이미 어두워진 밤. 비바람은 더욱 사나워져 갔다.
"아마 어디선가 폭풍우를 피하고 계신 것 같구나. 걱정 마렴. 바람이 잔잔해지면 곧 돌아오실 테니."
아빠는 총각시절 마을 비행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할 만큼 비행에 관에선 최고였다. 엄마는 나도 아빠를 닮았으니 청년이 되면 최고의 비행기술을 자랑하는 새가 될 거라고 했었다.
"휘이익! 쏴아!"
엄마는 몰아치는 비바람을 등지고 나를 더 꼭 안으셨다. 엄마의 품은 늘 따뜻했다. 아무리 무서운 폭풍우도 엄마의 품에선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잘 자라. 우리 아가. 예쁜 꽃들도 잠이 든다네. 노랑나비도 쉴 곳을 찾았다네..."
익숙한 엄마의 자장가가 들려왔다. 나는 심장까지 전달되는 엄마의 심장박동과 부드러운 자장가에 스르르 잠들이 들었다. 이것이 내가 기억하는 엄마의 마지막 품이었다. 그리고 깨어나 보니 이 병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