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날아가는 새 - 돌아 봄 없이

#위대한 비행 <존-날지 못하는 새>

by 청연

잘 다려진 관제사 제복과 반짝반짝 빛나는 단추.

시원한 바람과 그 바람에 밀려 '또로로록' 굴러가는 가을 낙엽.

익어가는 열매들의 소리...

딱 한 걸음. 그 한 걸음만에 그 모든 기억이 다시 소환됐다.


지난가을 처음 비행학교 교정에 발을 들였던 때가 생각났다. 그날의 일기장에는 '태어나 가장 행복한 날들'이라고 적혀있다. 많이 부끄러웠고, 또 많이 웃었던 학생 시절. 그때가 처음이었다. 내 삶에 희망의 빗장이 풀린 건.


비행학교 입학은 사고 이후 내게 온 삶의 첫 번째 전환점이었다. 비행 관제사. 그저 아련한 동경을 품고 이곳에 왔었다. 하지만 비행학교는 나에게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자존감! 이곳은 장애를 입은 새도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자존감을 주었다. 또 피를 나눈 친 형제보다 더 소중한 산티아고를 주었다. 무엇보다 당신의 가장 소중한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마음, 그 무한한 사랑을 알게 해 주었다. 그때는 그렇게 지나쳐 버렸지만 다시 교정을 들어서는 오늘 그 모든 기억들이 마치 폭포수 아래 바위에서 튀어져 나오는 크고 작은 물방울처럼 흩날렸다.


◇◇◇


'변한 게 없구나...'


비행학교의 교정을 들어서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변함없는 풍경. 마치 오랫동안 나를 기다려 왔다는 듯, 나를 위한 무대처럼 텅 비워둔 교정. 다시 가을. 가장 즐거웠던 날들을 소환하며 교정을 가로질러 걸었다.


"어서 오렴. 존. 널 비행학교에서 다시 보게 되다니 무척이나 기쁘구나!"


비행훈련을 위해 마련된 특별 장소로 들어서자 미리 마중 나와 기다리고 계시던 비행학교 교장 선생님이 반갑게 나를 맞아 주셨다.


"그동안 안녕하셨어요? 교장 선생님!”


감회가 새로웠다. 오랜만에 뵙는 교장선생님의 얼굴에도 지렁이 주름이 제법 느셨다.


"존. 어디 보자. 이야 정말 멋있는 날개로 구나. 정말 너게 잘 어울리는 날개야!"


"고맙습니다. 사실 아직은 어색해요. 그래도 많이 익숙해지긴 했어요."


"그래. 그래 그럴 테지. 존, 우리 조금 걸을까?"


"네. 좋아요."


비행학교 학생 시절에는 교장선생님과 이렇게 함께 나란히 걸어볼 기회가 없었다. 어색했지만 몇 걸음 걷지 않아 나보다 조금 앞서 걷는 교장선생님의 등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구나. 너의 할아버지께서 나를 찾아오셨던 날이."


"네. 저 때문에 많이 곤란하셨죠?"


"그래. 아니라고 할 수는 없겠구나. 너는 우리 비행학교의 입학규정까지 손보게 했으니 말이야. 하하."


"죄송해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교장선생님이 입학을 허락해 주신 덕분에 의미 있는 일을 할 수 있었어요."


"그 감사는 네 할아버지가 받아야 할 것 같구나."


"네?"


교장선생님은 잠시 걸음을 멈추셨다.


"존, 여길 보렴."


교장선생님이 가리키신 곳은 '비행학교를 빛낸 인물'들 보드였다. 내가 비행학교에 다닐 때는 없었는데 새로 만들어진 듯했다.


"와. 너무 멋져요. 비행학교를 빛낸 선배님들이 한눈에 보이네요!"


"그래. 우리 비행학교의 자랑이자 마을의 히어로 들이지. 존, 저기 맨 위를 보렴."


고개를 들어 보드의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사진을 보았다. 히어로 세 분의 사진이 걸려있었고, 가운데 사진 아래에는 반짝이는 훈장이 달려 있었다.


"어? 저건... 할아버지 히어로 훈장?"


"그래. 존, 너의 할아버지 이름과 훈장이지."


"그럼. 양 옆에 계신 두 분은..."


"할아버지 편대에서 전사하신 두 분이란다. 거대한 독수리 침공 이야기는 잘 알고 있지?"


"네. 그럼요. 할아버지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그래. 할아버지와 전사하신 두 분은 우리 마을에 영웅이시지. 누구도 그건 부인할 수 없어. 그 세분에게 우리 모두는 생명의 빚을 진 거란다. 그 큰 독수리가 마을을 휘젓고 다녔다면 누구도 무사할 수 없었겠지. 아직 깨어나지 못한 알들은 물론이고..."


독수리 침공 사건은 교장 선생님이 어릴 때였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날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셨다.


"할아버지가 히어로 훈장을 내미시며 말씀하시더구나. '우리 존이 비행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 히어로 훈장으로 내 보장하리다. 존은 분명 누구보다 뛰어난 학생이 될 거란 걸 말이요.'라고..."


"아..."


할아버지가 훈장과 내 입학허가서를 맞바꾸었다고 하셨던 그날이 생생히 떠올랐다.


"난 비행이 불가능한 학생을 입학시키는 건 비행학교 규정과 전통에 위배되는 중대한 결정이니 잠시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었지.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럼 생각을 마치실 때까지 이곳에서 한 발 도 움직이지 않고 기다리겠소. 천천히 하시오. 며칠이 걸려도 좋습니다.'라고 하셨단다. 오, 그땐 정말 곤란했지..."


"그래서 허락해 주신 거군요. 제 비행학교 입학을..."


"그래. 할아버지는 돌아가실지언정 한 발짝도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거든. 교장실에서 돌아가시게 해서야 되겠니? 하하."


"참. 할아버지는 대단한 분이세요. 정말 용감한 히어로였어요. 제겐 한 없이 부드럽지만요."


교장 선생님은 아직 할 말씀이 남아 있다는 듯 나를 보셨다.


"존, 그 '조건부 입학허가서'는 널 위해 할아버지께서 부탁하신 거란다."


"네. 할아버지께서요?"


"그래. 그래. 쉽게 오는 건 쉽게 가는 법이라고 할아버지가 말씀하시더구나. 네가 더 열심히 노력할 수 있게 꼭 그렇게 해 달라고 하셨단다. 참 마음이 깊으신 분이지."


"그랬군요. 할아버지가..."


"훈장을 다시 돌려 드리려 했지만 사양하셨단다. 네가 무사히 졸업을 마치면 그때 다시 받겠다고. 마치 보증처럼 말이야. 네가 졸업하던 날 할아버지께 돌려드리려 했지만 다시 사양하셨어. 이미 충분하시다고. 히어로 훈장이 더 의미 있는 일에 쓰이면 좋겠다며 학교에 기증하셨지. 그래서 그 훈장으로 비행학교 히어로 보드를 만든 거란다. 세대가 지나도 잊혀선 안될 이야기들을 마침내 기록으로 남기게 된 거야."


오랜만에 찾은 비행학교에서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뭐라고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할아버지께도 교장선생님께도..."


"존, 우리 모두는 누구나 은혜의 빚을 지고 산단다. 우리는 종종 그것을 잊어버리지. 우린 할아버지와 히어로들께 큰 빚을 졌고 그걸 네게 돌려준 것뿐야. 네게도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 거야. 비록 그게 언제일지 어떤 일이 될지 또 누가 될지는 모르지만 분명 그런 날이 오겠지."


"네.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 많은 은혜의 빚을 갚을 날이 오기를..."


다시 꿈만 같았다.

지나온 모든 일들이 새롭게 보였다. 돌아보니 지나온 어느 날 하나 나 혼자 만들어낸 날이 없었다.


◇◇◇


"존. 이건 비행학교에서 비행훈련을 시작하는 널 위해 준비한 선물이란다. 열어보렴."


교장선생님이 미소를 지으며 작은 상자를 하나 건네주시면서 말씀하셨다.


"선물까지요? 어떻게 더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조심조심 네모 반듯한 상자의 뚜껑을 열어보았다.


"아!..."


뚜껑을 반쯤 연채 얼어붙은 눈사람이 되어버렸다. 상자 속에는 하늘을 닮은 푸른색 비행 슈트가 있었다. 비행 슈트는 홀로 관제사복을 입고 다녔던 비행학교 시절 내내 동경했던, 아니 지금껏 모든 날들을 통틀어 꿈꾸었던 것이었다. 그 비행 슈트의 오른쪽 가슴에는 비행 명찰이 달려 있었다.


'Jon [the Son of Great Hero]'


비행 명찰에 날개 끝이 닿았을 때 가슴에선 벅찬 감동이 바위틈을 터져 오르는 샘처럼 솟구쳤다.


"교장 선생님, 이게 정말 꿈은 아닌 거죠?"


살면서 이보다 더 감동적인 순간을 맞아 본 적이 있었을까? 비행복을 쥔 손도 마음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떨렸다.


"하하. 그럼. 그럼."


환하게 웃어주신 교장선생님은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셨다.


"축하하네. 비행 훈련생으로 다시 비행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을! 비행학교에 두 번 입학하는 학생은 비행학교 역사상 자네가 처음이야. 지금부터 매 순간 비행학교의 역사가 새로 써지는 걸세. 아 그러고 보니 자네가 관제사로 입학했을 때부터 이미 써지고 있었구먼! 하하."


처음 비행학교에 입학했을 때 교장선생님의 표정은 조금 어두웠다. 그 어둠은 '저 아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교장선생님은 티 내지 않으시려 하셨지만 할머니의 '직감적인 눈치'를 닮은 나는 단 번에 알아챘다. 그런데 오늘 나를 바라보는 교장 선생님의 눈 빛은 무한한 신뢰였다. 교장 선생님의 표정에서 읽히는 관심과 응원이 고스란히 마음에 와닿았다. 이제 교장선생님과는 지금 서로가 마주 선 '한 발짝' 거리만큼 아주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나는 다시 비행복과 명찰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왠지 더 잘 해내야 할 것 같아요. 그럴 수 있을지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요..."


"그래. 충분히 이해하네. 날개를 얻은 기쁨만큼이나 부담도 클 테지."


"네. 사실 그래요. 할머니 할아버지와 친구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제가 비행할 수 있기를 응원하고 또 돕고 있어요. 교장 선생님처럼요. 제겐 참 감사한 일이죠. 그런데 그들의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하는 부담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커요. 솔직히 병실에 있는 동안 가끔은 괜히 날개 이식 수술을 받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어요. 참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그게 가장 솔직한 제 마음이에요."


정말 그랬다. 부담이 아주 컸다. 이제 내가 날고 못 날고는 단순히 나 하나만의 운명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조류 역사상 한 획을 그을 사건'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산티아고의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교장선 냉님은 다시 한번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존. 조금만 더 걸을까?"


밀려오는 부담으로 조금 긴장한 듯한 내게 교장선생님이 다시 걷자고 청하셨다. 우리는 비행 훈련소를 벗어나 큰 나무 숲, 자연이 풍경이 아름다운 교정을 한동안 말없이 교정을 걸었다. 그러다 한 무리의 새떼를 보시며 교장선생님이 입을 여셨다.


"존. 우리 새들은 날아갈 때 뒤를 돌아보는 법이 없지. 필요하다면 속도를 늦출 뿐 뒤를 돌아보지는 않아. 그건 신께서 우리 새를 만드실 때 이미 정하신 거지. 다른 피조물과 우리 새들 간의 큰 차이점이지."


"네...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지만..."


"저 날아가는 새떼를 보렴. 어느 하나도 뒤를 돌아보는 새는 없지. 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는 거야. 눈을 크게 뜨고 오로지 앞으로, 앞으로 목표를 향해 날아가는 것. 그것만이 오로지 날아가는 새들이 할 일이라네."


"네. 교장 선생님."


잠시 후 다시 말씀을 이어 가셨다.


"너무 애쓰지 말게."


"네?"


"비행훈련 말이야."


"네..."


"나는 존, 자네가 자유롭게 하늘을 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이 비행훈련장을 만들었네. 정말 자네가 날 수 있기를 바랐어. 아, 물론 지금도 바라고. 그런데 말이야..."


잠시 말을 멈추시곤 다시 이어 가셨다.


"혹, 자네가 하늘을 날 수 없다 해도 말이야 그리 슬픈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


"..."


"우리 새들 에게 비행만큼 중요한 것은 없지. 그렇지만 오직 비행만이 새들의 삶이 아니라는 뜻이네. 더 가치 있고 소중한 일들이 많이 있지. 나도 자네 나이 때는 잘 몰랐던 것 같아. 조금씩 내 몸을 날아 올리기 버거워질 때 삶이 내게 말해 주더군. 더 멀리 더 높이 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음..."


"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순 없겠지. 그것이 가끔 삶을 압도하는 때도 있을 거야. 그렇지만 생각해보게. 할머니와 할아버지, 자네의 친구들이나 나를 포함한 자네를 응원하는 주변의 모든 이들의 마음의 본질은 무엇일까? 자네가 그들에게 잘 보여서, 무언갈 잘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네. 자네도 잘 알다시피 그들은 자네가 지금껏 비행을 할 수 없었던 모든 날 동안 자네를 아껴왔네. 그건 우리 모두가 '존'이라는 한 존재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 자네가 비행을 할 수 있다면 그건 두말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야. 아마 난 '할렐루야'를 외칠 걸세! 하지만 그보다 더 기쁜 일은 자네가 비행의 꿈을 다시 꿀 수 있다는 것이네. 날개 잃은 아픔을 가진 한 새가 다시 희망을 향해 도약하고 있는다는 거야. 우리 모두는 그걸 바라고 있는 거라네. 지금 자네를 위해 불어 주는 이 모든 바람처럼 말이야."


"네..."


"그저 날아가는 새가 되게. 자네의 마음이 뒤돌아 봄 없이 '날아가는 새'가 되도록 하게. 곧 자네의 몸도 그와 같이 날아갈 테니."


'나를 위해 불어주는 모든 바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햇살이 커다란 나무 틈으로 파고들고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흔들리는 나무들 사이로 하늘이 보였다. 왠지 나뭇잎 사이 손바닥만 파란 하늘이 한없이 넓게 보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9장. 나이팅게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