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위대한 비행 <존-날지 못하는 새>

by 청연

우리 삶에 있어 가장 안타까운 일은

'가능'으로 태어나 '불가능'으로 살아간다는 점이다.


어떤 이는 말했다.

불가능은 숙명(宿命, Something you can't change)이라고.

어떤 이는 말했다.

불가능은 운명(命, something you can change)이라고.

또 어떤 이는 말했다.

불가능은 섭리(攝理, Divine providence - something you should accept)라고.


그러나 나는 믿는다.

불가능은 아무것도 아니(Impossible is Nothing)라고!




2021. 5. 17.


어이가 없다.

잠이 오지 않아 밤새 뒤척였다.

건설 현장 일용직 6개월 만에 찾아온 꿀 같은 휴식! 이런 허탈감과 불면증은 정말 어이가 없다. 한국에 있을 때(9년 전부터 나는 해외 이민 분투 중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불가피하게 고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제 막 '꽃이 필 것 같은 인생'을 목전에 두고...)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이라도 실컷 읽어두려고 피곤한 몸을 바짝 각성시킬 커피를 과도하게 즐기며 - 정확히는 '퍼'마시며 - '닥치는 대로 읽기'로 무리한 탓이 아닐까 싶었다. 지난 두 달여 새 온·오프라인으로 약 100여 권의 책(온라인 서재 - 독서 무제한 서비스를 알게 되면서 극적으로 주머니 얇은 내게도 독서 천국의 문이 열렸다.)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평소 쓰지 않던 근육을 쓰면 근육통이 오듯 아마도 뇌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싶었다.


이상하지만 멈출 수 없는 여행 - 꿈.

밤새 머릿속은 그야말로 대혼란 속이었고, 무언지 모르지만 아마도 반 수면 - 절반의 무의식 - 상태에서 갑자기 이상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것은 한 마리 새였다. 오른쪽 날개를 다친 어린 새였다. 왜 그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는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나는 직접 눈으로 보듯 선명한 상상 속 - 어쩌면 꿈일지도 모르는 - 그 새를 따라갔다. 그리고 나는 곧 알게 됐다. 왜 그 어린 새가 날개를 다치게 됐는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다시 날개를 가지게 됐는지. 마치 오직 나만을 위해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된 영화처럼 영상이 흘러갔다. 시간은 꽤 흘렀고 아직 마지막 장면 - 어쩌면 클라이 맥스 - 직전에 나는 잠자리에서 몸을 번쩍 일으켜 앉았다. 아직 동이 트기 전, 깊은 새벽이었다. '혹시 새소리가 들렸을까?' 창문을 열고 아직 어둠이 한창인 풍경을 바라보았다. 새는 없었다. 거기엔 단지 깊은 어둠과 숨죽인 고요만 있었다.


기억의 추적자!

눈 깜빡하면 놓칠까 봐 최대한 서둘러 기억을 쫓아갔다.

몸을 돌려 나와 함께 잠들었던 - 아니 먼저 잠든 얄미운 컴퓨터를 깨웠다. 정말 똑같이 슈퍼맨 자세로 잠든 두 딸아이를 깨우지 않게 조심스럽게! '톡톡' 자판을 누르며 기억을 따라 한 줄 한 줄 기록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그 기억의 잔상이 아직은 선명했기에 거칠게 기록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을 기록하는 순간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리고 사흘째 되던 날 새벽.

'아!'

순간 아직 덜 익은 청포도의 신맛을 입안에 가득 느꼈다.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아직 '글이란 바다'에서 어떻게든 써보려고 허우적대고 있는 내게 일어난 기적! 마치 호흡을 참고 마라톤을 한 번에 달려간듯한 숨 가쁨과 가슴 벅참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마침표에 놓인 커서는 별처럼 반짝였고, 나는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리고 꿈보다 짧았던 휴가는 끝났다.


미뤄둔 꿈은 반드시 우리 게 묻는다.

'나 없이 잘 지내고 있니?'

다시 시작된 일로 한 달여 동안 미루어 두었던 '존 - 날지 못하는 새'를 다시 소환했다. 꿈에서 보지 못한 - 어쩌면 미처 다 기억하지 못한 - 클라이맥스를 적으려 했다. 그것은 고통이었다. 어쩌면 그 원초적 고통은 너무도 당연했다. 글을 한 번 써보겠다고 생각한 지 고작 1년. 그것도 3번의 이민생활을 생활기를 기록하는 글들이 대부분이었다. 시를 써보겠다고 고심하긴 했다. 딸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 큰 딸이 "아빠는 입을 열면 마치 60대 시인(참고로 나는 아직 40대 초반이다.)이 이야기하는 것 같아!"라고 해서 충격을 받은 날 역사와 교훈을 재미있게 전달할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 를 재미있게 써본다고 우화 형식으로 짧게나마 두어 번 써보긴 했었다. 그런 내게 '소설'이란 장르는 정말 소설 같은 이야기였다. 대개는 이런 걸 '불가능'이라 하지 않는가?


'결정적인 순간'은

항상 스스로 써내려 가야 한다.

'아! 그때 끝까지 버티고 봤어야 했어!'

나는 끝내 보지 못한 클라이맥스를 상상하는 동안 나는 무릎을 치며 몇 번이나 탄식했다.

'존'이 어떻게 날아오를 수 있었는지 봐 두었어야 했어! 아무리 꿈을 돌이켜 봐도 그 찰나의 순간은 없었다. 한참의 궁리 끝에 나는 절벽을 만들었고, 나를 절벽 끝으로 몰고 갔다. 그리고 거기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상상했다. 그 하나하나, 모든 순간순간을! (그 순간만은 마치 내게도 실제 날개가 있는 것 같았다.) 마침내 존이 절벽에서 땅바닥을 스치고 올라왔을 때! 눈물이 핑 돌았다.(이 스스로 당황스러운 순간은 아마도 마흔이 넘은 내 몸에도 점점 여성호르몬이 증가하고 있다는 증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존의 '은밀하고 위대한 비행'이 완성됐다. 그날 내게 클라이맥스를 보여주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오로지 나를 위해 남겨두신 '신의 한 수'였으리라! 절벽 끝에 선 나! 마침내 눈을 감고 온 몸을 던짐으로써 '알 수 없는 내일'을 향한 나의 태도를 더욱 확고하게 했다. 실로 '두려움을 깨부수는 망치! - 용기'는 삶의 절벽에 설 때만 제 능력을 100% 발휘한다.


<존 - 날지 못하는 새>는

'둥지'와 '날개'를 잃은, 나와 우리의 이야기다.

우리는 '가능'으로 태어나 '불가능'으로 살아간다.

어릴 적 나는 어른이 되면 '가능'이 더 많아질 줄 알았다. 그래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 엄마에게 100원짜리 왕 눈깔사탕(1987년 8살 때 사건) 하나 얻어먹으려 눈감고 조르다 7m 콘크리트 다리 위에서 돌바닥 아래로 자유 낙하해 '오른쪽 팔'을 부러뜨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이것이 내가 번지 점프를 싫어하는 이유다.) 아직 따뜻하고 지극히 고소한 '호두과자'향기를 시골 버스 안에서 한껏 풍기는 정말 교양 없는?(그 당시 생각) 아이와 그 부모가 부러워 어른이 되면 호두과자를 단번에 만 원어치 사 먹겠다는 당찬 꿈도 이루어 질거라 생각했었다. 그때를 공식화하자면 '어른 = 가능' 쯤이 될 것이다. 마치 '만사 프리패스' 같은! 그런데 막상 어른이 되어갈수록 가능의 영역이 점점 줄어들더니 불가능이 그 자리에 슬쩍 뭉개고 앉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이젠 노골적으로 - 마치 일식처럼 - 불가능이 가능을 꿀꺽꿀꺽 삼켜 갔다. 이제 가능은 고갱이를 쏙 내어준 채 그저 가장자리 - 테두리에 그 흔적만 남았다. 이런! 탄식할 일이다.


그대와 나,

우리는 '오른 날개'를 잃어버렸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돌이킬 '뭔가 강력한 것!'이 필요하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오른쪽이 가지는 의미는 비슷하다.(Right ; 오른, 올바른, 건강한, 적당한, 정확한, 정의로운 그리고 권리... 대개의 긍정적인 뜻) 글 속에서 존은 오른쪽 날개를 다쳤고 오른쪽 날개를 완전히 잃기도 했다. 굳이 오른쪽 날개여야 했을까? 내 무의식이 존을 그렇게 그렸다. 그런 아마도 오른손잡이였던 내가 어릴 쩍 부주의한 사고로 추락하면서 오른팔이 완전히 부러졌을 때 그 불편함을 뼛속까지 기억하기 때문이지도 모른다.

'아! 그때...'

더욱 뼛속까지 파고드는 아찔한 기억은 그 부러진 오른팔을 치료하는 과정이었다. 물론 아버지의 등에 매달려 시내 정형외과에서 응급조치를 받고 깁스를 한채 다시 시골로 먼길을 돌아와야 했다.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차라리 병원에서 부러지고 어긋난 뼈를 맞춘다고 이리저리 비틀 때 - 가히 살인적인 고통이었다 - 가 나았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막내아들을 빨리 치료해야겠다고 결심한 엄마는 예로부터 민간에서 전해오는 치료 비법을 끝내 알아내 손수 준비해두고 계신 상태였다. 그 명약은 바로 '똥물'이었다. 으흠. 여러분의 상상이 맞다. 뒷간에서 신선하게(?) 퍼올려 순수하게 걸러낸 그것이었다. 그 색은 흡사 한약과 다를 바 없었다. 맛은 도무지 어찌 표현할 방법이 없다.(시중에 '똥맛'이라고 나오는 과자들이 있던데 단언컨대 절대 그런 순한 맛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태어나 처음 맛보는 '불가능'이었다. 그러나 나와 마주한, 반드시 아들을 치료하고자 하는 의지가 확고한 엄마에게 불가능이란 없었다. 그 덕에 나의 불가능은 마침내 입을 열었고, 단 숨에 가능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내가 기억하는 가능의 첫 승리였다. 결국 불가능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보다 더 결연한 의지를 가진 이에겐!


성장의 역설!

우리는 성장하면서 조금씩 잃어간다.

꿈, 희망, 소망... 그리고 '오른 - 가능'의 영역들...

어느 날 문득 당신이 '날개를 잃은 새'처럼 느껴질 때, 이 몇 장의 글들이 작은 위안이 되길 바라본다.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가면서 존이 바라본 창가의 봉우리 진, 그 희망의 꽃이 활짝 피길. 마침내 훨훨 날아 당신의 별까지 닿을듯한 기분을 충전받길 감히 바라본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이 '*존 - 신의 선물'임을 발견하길 바란다.

그 작고 서툰 바람이

이 긴 글의 처음과 마지막이다.


*존(Jon)은 조나단(Jonathan)의 애칭으로 '하나님의 영광 또는 신의 선물'이란 뜻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세상에서 가장 느린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