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별을 따라가라 1부. 4장

4장. 독학으로 일깨운 세 번째 영혼, 러시아어

by 청연
4장. 독학으로 일깨운 세 번째 영혼, 러시아어
- 닥치고! 러시아어
- 배움의 시작과 끝, 재래시장
- 내친김에 카자흐어까지 넘보다
- 러시아 문학에서 찾은 배움, 그 희열에 관하여


닥치고! 러시아어

To have another language is to possess a second soul.
또 다른 언어능력을 갖는 것은, 두 번째 영혼을 소유하는 것이다.
- 샤를마뉴 대제 -


싸샤는 가능하면 한국에서 러시아어를 조금이라도 공부해 오라고 당부했었다. 글로벌 언어인 영어는 우리가 살 카자흐스탄 특히, 지방 도시 심켄트에서는 무용하다고 했다. 대신 현지어인 카자흐어나 공용어인 러시아어를 배워야 한다고 했다.


기왕이면 러시아어를 배우는 게 좋아.


싸샤는 두 가지 어를 동시에 배우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활용도가 더 높은 러시아어를 먼저 배우라고 권했다. 그의 경험상 한국인에게는 러시아어가 카자흐 어보다 훨씬 배우기 어려운 언어이긴 하지만, 배워두면 두고두고 쓸 일이 많을 거라고 했다. 카자흐스탄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CIS) 대부분의 국가가 러시아어를 공용어나 상용어로 쓰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듣고 수치로 비교해보니 답이 딱 떨어졌다. 러시아를 포함한 러시아어 통용 국가, 인구 약 17개국, 약 3억 명 vs 카자흐어 사용인구 카자흐스탄 1개국, 1,700만 명. 활용도 면에서 러시아어가 압승이다.

답이 명쾌히 정해진 셈이다.


언어는 존재의 문제에 이른다

러시아어를 반드시 배워야 하는 이유를 피력하던 그는 자신의 경험담을 덧붙였다. 본인이 고려인이긴 하지만 한국어를 많이 잊어버린 세대라 한국에서 대학원 유학 시절 초반에는 고난의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천상 한국인 얼굴을 한 그가 한국말을 잘하지 못하니 주변 사람들이 의아해하기도, 때로는 놀리기도, 어떤 어르신들은 핀잔을 주기도 했단다.


그땐 정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었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상상조차 못 할 거야.


하지만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언어 고립감’이 주는 외로움이라고 했다. 우리도 현지 통용어를 모르면 결국에는 외로워질 거라고 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을 정도로... 사람마다 성향은 다르지만 그의 의견에 충분히 동의됐다.


'격'이 다른 언어 - 러시아어

한국에서 출국 준비 기간 동안 ‘간’이라도 보려고 러시아어 기초회화 책과 기초문법 책을 한 권씩 샀었다. 동네 서점에는 러시아어 회화책을 찾을 수 없어서, 인터넷 서점을 통해 후기가 좋은 책을 주문했다. 사실 러시아어는 일부 러시아어를 전공하는 사람이나 무역 종사자를 제외하면 아직 대부분 한국인에게는 ‘관심 밖’의 언어다.


지금껏 한 번이라도 러시아어를 듣거나 본 적이 있었던가?


하기야 나만 해도 지금껏 러시아 사람을 만나본 적도 러시아어를 들어 본 적도 없다. 주문 후 곧 택배로 도착했고, 따끈하고 신선한 책 냄새 풍기는 책을 기대감으로 펼쳐 즉시 몇 장을 훑어보았다.


Здравствуйте! 즈드라스트부이쩨-안녕하세요!
Спасибо 스빠씨바-감사합니다.


인사말은 길고도 어색했다. 이런... 스빠씨바, ···씨바라니! 실소가 터졌다. 우리말 어감으로는 조금 야릇한 말들... 몇 번이고 읽어보지만 입에 영 달라붙질 않았다. 몇 장 더 넘기니 기초 문법이 설명되어 있었는데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단어마다 ‘성 Gender’이 정해져 있는데 여성, 남성 그리고 중성 3가지에 그것도 6가지 '격'으로 변화한다고 했다.


여성, 남성은 그렇다 쳐도, 중성은 뭐지?


그저 명사에 조사만 더하면 되는 단순한 한글과는 그야말로 ‘격’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지금껏 영어를 공부하면서 참 배우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예외와 불규칙 변화가 많아 배우기 어려운 언어 - 영어. 그런데 두 권의 책을 대충 훑어보면서 러시아어를 대면한 첫 느낌은 이랬다.


아, 깜깜하고 갑갑하다!


조금 쉽게 공부할 방법이 없지 않을까 싶어 특별한 비법을 찾아 인터넷 서핑을 했는데 더욱 절망스러웠다. 러시아어 학습 주요 키워드는 '러시아어, 한국인이 배우기 어렵다, 이해하기 힘들다' 등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그랬나 보다. 이제 곧 나도 그 무리에 합류하게 되겠지...


문득 샤를마뉴 대제 Charles the Great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는 문자와 다른 언어 배우기를 동경하며 책을 베개 삼아 베고 잤다고 했다. 그것이 실제 배움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 배움의 의지만은 참 본받을 만했다.

배울수록 문자는 그 자체로 완벽한 예술이다.


또 하나의 언어능력을 갖는 것은, 두 번째 영혼을 소유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영혼을 소유한다는 것 참 낭만적인 일이다. 그 결과는 참 멋있지만 단지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다는 게 함정 일터. 어쩌면 그래서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이 쉽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또 다른 영혼'을 소유하는 거니까.


이 배움의 끝에, 마침내 러시아어가 나의 세 번째 영혼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배움의 시작과 끝, 재래시장

왜 하루는 25시간이 아닌가?

싸샤가 왜 언어를 조금이라도 준비해오라고 했는지, 카자흐스탄에 도착한 첫날 피부에 와 닿았었다. 그것은 알마티 공항에 도착해서 여권심사를 받을 때 느꼈던 영어의 무용함이었다. 사실 현지인들과 소통이 안 되면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좋든 싫든 내게 주어진 또 하나의 인생 과제, 새로운 언어. 사실 조금은 쉽게 생각했던 이민 생활의 첫 장벽이었다. 막상 현장에 오니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고, 돌아갈 방법도 없는 장애물. 언어 - 러시아어는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정면 돌파해야 할 숙명적 과제였다.


심켄트에 온 이후로 하루 5시간 이상 자본 기억이 없다. 새벽에는 아내와 시장을, 낮에는 싸샤와 함께 동행하면서 매장 준비를, 저녁에는 메뉴 준비와 조리 연습, 레시피 완성을 위해 집중했다. 그리고 나면 늘 열두 시나 되어서나 싸샤와 일일 진도 확인과 다음 날 일정 회의가 끝났다. 그러다 보니 아침부터 밤까지 언어를 공부하기 위해 별도의 시간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루가 25시간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온전히 홀로 쓸 수 있는 시간은 오직 새벽.

자정이 지나 아이들과 피곤함에 지친 아내가 먼저 잠들면,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다른 방으로 건너가 한국에서 가져온 러시아어 회화책을 꺼내 앉았다.


휴~!


자리에 앉으면 늘 한숨이 먼저 나왔다.

눈꺼풀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다는 말은 참 진리다. 어떻게든 잠을 쫓아보려고 인스턴트커피를 사발로 들이키기도 하고, 눈과 볼을 연신 비비며 꺼져가는 촛불같이 근근이 책장을 넘겼다. 배움의 속도를 내고 싶어도 이놈의 러시아어는 공부할수록 어렵고 복잡해졌다. 매일 거대한 벽 앞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묻고 또 묻고 쓰고 또 쓰고

"그럼, 이 말은 러시아어로 어떻게 해요?"

싸샤는 친절히 몇 번씩 반복해 알려주었지만 듣고 돌아서면 다시 깜깜한 암흑. 머릿속에 마치 지우개가 있는 듯 순간 삭제되는 이 놀라운 뇌의 기능은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최고의 어학원, 재래시장

언어를 배우고 익히기에 가장 좋은 장소는 재래시장이었다. 책을 아무리 붙잡고 있어도 머릿속을 겉돌기만 했는데, 시장에서는 생생한 한 실용 언어를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매일 장을 보러 갈 때마다 하고 싶은 말이나, 사야 할 재료들을 미리 적고 몇 번이라도 입에 익혀서 가려고 노력했다. 가끔 의도적으로 내가 준비해 간 대화 패턴을 유도하기도 했는데, 공부해둔 문장과 발음이 맞는지 확신을 가지는 것은 이 방법이 가장 좋았다. 그러다 보니 마주치는 모든 상인이 선생인 셈이다.


내 발음이 부정확하거나 알아듣지 못할 정도면, 상인이 확인 차 되물어주어서 즉시 교정이 가능했다. 물론 가끔 내 웃긴 발음 때문에 배꼽 잡고 웃는 상인도 있었다. 그럴 땐 그저 같이 웃었다. 내가 어떤 단어들을 마치 '욕'처럼 느꼈듯, 어떤 러시아 단어들은 내 어눌한 발음이 그들에겐 아주 해맑게 웃으면서 내뱉는 '욕'처럼 들렸기 때문일 것이다.

열린 어학원, 재래시장

처음 시장에 갔을 때 내가 쓸 수 있었던 러시아어 문장은 세 가지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얼마예요? 비싸요(깎아 주세요)! 감사합니다!


정말 처음에는 이 짧은 문장도 쉽게 나오질 않았다. 상점 앞에 서 있으면 상인들은 무엇이 필요한지 물어보거나, 그들이 추천하는 것들을 말했는데 전혀 알아듣지를 못하니 답답하기만 했다.


스꼴까 에따 스토잇? Сколько это стоит - 이거 얼마예요?


웃긴 건 자신 있게 얼마냐고 물어는 보지만 정작 상인이 얼마라고 하는지 못 알아듣는 것이었다. 그래도 연습 삼아 일부러 더 많이 질문했다. 가끔 종이와 볼펜을 꺼내 써달라고 내밀거나, 핸드폰 계산기를 켜서 넘겨주면 상인이 웃으면서 적어줬다.


물건을 살 때마다 가격을 적고, 집으로 돌아가서는 그날 산 물품과 재료들을 그림을 그려가며 빨리 익히려고 노력을 했다. 여러 방법을 해봤지만 그림을 직접 그리면서 익히는 게 가장 도움이 되었다. 일종의 연상 연상 암기법. 유치하고 웃긴 게 기억에 더 잘 남았다.


그날그날 배움의 노트, 유치하지만 기억하기 쉽게 적었다
단어가 문장으로, 문장이 문단으로

간절함으로 빼곡히 채워진 노트

간절함은 '간이 녹는 것 같은 절박함'이라 했다.

처음에는 오기로

그다음에는 간절함으로 달려든 배움이었다.

무엇을 봐도 ‘저건 러시아어로 뭘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러시아어에 완전히 미쳐 두 달이 넘어가던 어느 밤. 나도 모르게 무릎을 ‘탁’ 쳤다.

끝내 잡힐 것 같지 않던

‘그놈의 꼬리’를 잡은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림카드는 직관적이라 가장 도움이 많이 됐다

노력 - 비록 더딜지라도 배반함은 없다

성장의 결과는 곧 드러났다. 어느새 단골이 된 시장 상인들도 가끔 만나는 싸샤의 현지 친구들도 그새 러시아어가 많이 늘었다고 칭찬을 했다.


정말 잘해서 칭찬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노력은 인정받은 셈이다. 좀 쑥스러웠지만, 기분 좋은 변화였다. 더딘 배움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지만, 고생한 만큼 성취의 기쁨도 적지 않았다.


После грозы вёдро, после горя радость.

폭풍 후에 청명한 날 있고, 슬픔 뒤에 기쁨이 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고진감래苦盡甘來’와 같은 러시아 속담.



독학毒學(지독한 학습), 그 성장의 고통 후에는 반드시 기쁨이 온다.
그 기쁨과 더불어 또 다른 영혼이 탄생한다.




Время не ждёт

시간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그러니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며 살아라.

- 러시아 격언 -



내친김에 카자흐어까지 넘보다


러시아어와 더불어 카자흐어도 조금씩 익혀가고 있다. 카자흐어는 언뜻 보면 러시아어와 비슷해 보이지만, 근본이 다른 언어라 연계성이 적은 게 좀 아쉬웠다. 아직 시간적 여유가 없어 본격적으로 배울 엄두는 안 나지만, 카자흐어는 이곳에서 오래 '잘' 살기 위해 반드시 배워야 할 '미뤄둔 숙명'과도 같다.


"쌀레메트츠싀 베!Сәлеметсіз бе(카자흐어)-안녕하세요!"

"어, 카자흐어도 하네?"

한마디의 어눌한 카자흐어 인사에도 분위기는 좋아졌다. '그들의 언어'를 구사하는 매력은 바로 이런 거다. 닫혀 있는 마음의 문을 여는 열쇠다. 사실 외국인에게 유창한 현지어를 기대하지도 않으니 마음이 편하다. 물론 업무적으로 나누는 얘기는 다른 차원이지만.


카자흐어는 한국어와 '어문학적 유사성'으로 한국인이 배우기도 쉽고 재미있기도 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상대방을 칭찬할 때 자주 쓰는 단어 '잘했어!'는 카자흐어로 'Жарайсың 좌 라이 씐'인데 들리기에는 꼭 우리말로 '잘하였-씀'으로 들린다. 재밌게도 물 Water은 'Су수'다. 한자로 물을 '수'라고 부르는 것과 동일한 발음이다. 가축을 의미하는 단어는 'Мал-말'이다. 사람은 아주 낯익은 단어다. '아담Адам'. 이외에도 많은 단어가 한국어와 아주 비슷하다.


새로운 언어를 공부할 때면, 늘 넬슨 만델라의 명언이 떠오른다.

If you talk to a man in a language he understands, that goes to his head.
If you talk to him in his own language, that goes to his heart.

타인과 대화할 때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머리로 가고,
만약, 그 사람의 말(상대방의 모국어)로 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으로 간다.

- Nelson Mandela -


샤를마뉴 대제의 명언과도 의미가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다른 언어 능력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영혼을 소유하는 것이고, 그 사람의 언어로 얘기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마음)과 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참 멋지고 매력적인 일이다.




Қасқырды қанша асырасаң да тауға қарап ұлиды.

늑대는 아무리 훈련시켜도, 여전히 산을 바라보며 운다.

- 카자흐스탄 속담 -


늑대는 쉬이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노매드, 카자흐인을 연상케 한다.




[자투리 인문학] 러시아 문학에서 찾은 배움, 그 희열에 관하여

А какая цель вечной жизни?

Как и всякой жизни - наслаждение.

Истинное наслаждение в познании.


Oh, what is the purpose of eternal life?

Like all life - Delight.

The true delight in knowing.


오, 영원한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모든 삶이 그러하듯, 그것은 바로 희열이다.

그 참된 희열은 배움(앎)에 있다.


- 안톤 체호프 Антон Чехов, <검은 옷의 수도사 Чёрный монах> 중 -


희열喜悅은 기쁠 희喜에 기쁠 열悅을 더한 단어다. 마음으로 간절히 바라고 소망했던 것들이 마침내 이루어져, 그 넘치는 기쁨으로 북을 두드리며, 춤추는 모습이 그 속에 담겨있다. 배움, 그 앎에는 참 희열이 있다.

그래서 나는 더 많이 배우고, 더 자주 앎-깨달음 그 희열에 닿기를 바란다.

영원한 삶을 한순간에 닮을 수 있다면,

그건 바로 희열, 그 순간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감히 소망한다.

찰나 같이 짧은 우리 인생에서

셀 수 없는 영생을 건져낼 수 있기를...




[발견의 기쁨] '희열' 둘


희열을 품은 CALADIUM

칼라디움 CALADIUM의 꽃말은 'Great joy and delight' 즉, 대단한 기쁨과 희열이다.

칼라디움 꽃은 그 독특한 생김새로 인해 예수님의 심장 Heart of Jesus, 천사의 날개 Angel wings 또는 코끼리의 귀 Elephant ear라고도 불린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며,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너, 오늘은 몇 송이의 칼라디움을 발견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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