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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연 Oct 20. 2020

죽음의 품격

울림이 있는 존재

말끔한 차림의 한 신사와 한 테이블에서 차를 나누었다. 

그를 이전에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분명 내가 알고 있던 그가 분명했다. 

그는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내가 들었던 것보다 더 따뜻했다. 

그런 그에게 나를 맞긴 다는 건 행운임에 분명했다.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

아직 눈인사 외에 어떤 대화도 없었지만 그런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좋았다.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자비'라는 위로가 나를 쓸어내렸다.  

 

말이 없는 그는 마침내 찻잔을 들었다.  

먼저는 그윽이 차의 향기를 맡았고 그다음에는 차 한 모금 들고 손으로 찻잔을 몇 바퀴 돌리면서 유심히 무언가를 보는 듯했다. 

찻잔과 담긴 차에 그의 깊은 관심이 보였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마침내 사뿐히 찻잔을 제자리에 내려놓으면서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단 하나의 질문'을 건넸다. 


살아생전, '목숨을 걸만한 일'을 발견하였습니까?


음...
열심히는 살았지만 
생각해보니 정말 목숨을 걸만한 일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변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는 이유로 충분할 것 같았다.

다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모든 일이 목숨을 걸만한 일은 아니었다.

  

"이제 충분하지 않습니까?"

나는 고개를 들고 가슴과 어깨를 펴고 좀 당당하게 반문했다. 



당신은 아직 죽음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차에는 마음을 울리는 향이 없습니다. 

당신의 차에는 존재의 맛이 없습니다. 

당신의 차에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습니다.  


그저 물과 다를 바 없는 조금 따듯한 그것 일 뿐입니다. 

알아두십시오.

이런 차를 만드는 사람은 많지만 

이런 차로 천국을 소유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실 당신은 삶의 품격 조차 갖추기 못했습니다.

당신은 살았지만 산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당신은 아직 죽음에 합당한 사람이 아닙니다. 

생, 그 긴 세월 

목숨을 걸만한 일,

한 번도 진정으로 뜨거워 본 적이 없는 당신은 아직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가서, 다시 사십시오.

목숨을 걸만한 일을 찾으십시오.


그리하여 사십시오. 


살아, 삶의 품격에 걸맞은 

죽어, 죽음의 자격에 합당한 그런 삶을 사십시오.


마음을 울리는 향기 나는 

그 존재의 맛이 살아있는 

그런 삶을 다시 사십시오.


다시 사십시오.




당신은

목숨을 걸만한 일을 발견하였습니까?

그 일에 미치도록 뜨거워져 본 적이 있습니까?


아직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직은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살려합니다. 


향기 나는 

살아있는 존재로 다시 살아보려 합니다. 


- '20. 10. 20. 자욱한 안개 낀 아침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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