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르 파티 Amor Fati, 네 운명을 사랑하라 - 니체 -
3장. 가발공장의 추억
- 하바리 마사이!
- 내가 사는 작은 세상
- 바나나, 망고 그리고 초대하지 않은 손님
- 그냥 다 밀어!
- 하찮은 것들의 역습, 말라리아
- 정글의 법칙 '생존'
주말이 이렇게 행복했었나?
첫 주말이 왔다. 지난 3년간 사업장 오너로 살 때는 주말이 다가오면 오히려 더 바빴었다. 그래도 내 의지대로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다는 건 좋았었다. 하지만 이제 주중에는 제한되고 절제된 직장생활을 하다 보니 오히려 주말이 주말다웠다. 생각해보니 사업가와 직장인은 주말을 바라보는 관점에 극명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주말은 그저 좀 더 늦잠을 잘 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은지 침대에 꿀을 발라 놓은 것처럼 몸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불을 둘둘 말아 머리까지 덮고 있다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이불을 밀쳐내고 벌떡 일어났다. 이 황금시간을 이불속에서만 보낼 수는 없지! 얼른 씻고 읍내 시장에 나가 보기로 했다.
내 친구 마사이!
수화물 가방에 구겨 넣어 두었던 찌그러진 모자를 탁탁 털어 꾹 눌러쓰고선 기숙사를 나섰다. 조용한 공장 내부 길을 따라 메인 게이트로 내려가니 친근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멀대 같이 큰 키에 목에 두른 특유의 화려한 스카프! 그는 아프리카 대 초원의 대표적 원주인인 마사이족 경비였다.
“하바리 Sir! (Habari! - 안녕!)”
그는 나를 향해 장난스럽게 거수경례를 해 올렸는데 그건 우리 둘만의 ‘비밀스러운 친근함’의 표현이었다. 그의 건들건들 한 ‘새하얀 손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아주 불량한 거수경례는 늘 나를 웃게 했다. 전문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의 거수경례는 자세교정이 시급!! 했다.
“이꼬 싸와! (Niko Sawa! - 좋아!)”
그새 몇 마디 배운 스와힐리어로 웃으면서 절도 있는 거수경례로 답례해 주었다. 거수경례야말로 내 10년 전문이니까!
이 유쾌한 친구는 기숙사 생활하면서 제일 먼저 친해진 현지인 중 한 명이었다. 전입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통성명했었는데 한국에서는 뭘 했었는지 물어봐서 조종사였다고 얘기해 줬더니 놀란 듯 물었었다.
헬기 조종사였다고? 그런데 여기 뭐 하러 왔어?
“허, 글쎄... 아마 신의 뜻?”
그는 마사이족답게 양쪽 귀를 둥글고 크게 뚫어서 오백 원짜리 만한 구멍이 훤하게 보였다. 지금은 경비 제복을 입고 단정하게 근무를 해야 하니 저 큰 구멍이 휑하게 비었지만, 초원에서 살았다면 뭐를 달아도 주렁주렁 달았을 것이다.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전통 마사이족들처럼.
[하늘바라기, '기도하는 사람' 마사이 Massai]
하늘에 한 족속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하늘 신 ‘은가이 Ngai’의 자손들이었다. 그들은 늘 신비롭고 아름다운 지상 세계를 동경했다.
“동물을 죽이거나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
마침내 그들은 조건부 허락을 받았고 하늘로부터 내려진 밧줄을 타고 이 땅으로 내려왔다.
그러나 그들은 경고를 잊어버렸고 사슴을 한 마리 잡아먹었다.
분노한 신은 밧줄을 잘라버렸고 신은 그들에게 지상에서의 ‘수고’와 귀천의 ‘희망’만을 허락했다.
“함께 내려 보내주었던 소와 양과 염소를 열심히 쳐서 만족할 만한 수에 이르면 다시 하늘로 오르는 밧줄을 내려 주겠노라.”
그래서 그들은 ‘마사이 Maasai-기도하는 사람이란 뜻’가 되었다.
마사이족에게 성공적인 목축은 하늘 본향으로 돌아가는 그 희망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다.
- 마사이족 신화 -
내가 알고 있던 마사이족은 초원의 전사였다. 아마 이 마사이족 친구를 만나지 않았다면 평생 그렇게 알고 살았을 것이다. 그는 술과 담배를 좋아하고 늘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데 190cm는 족히 될 정도로 장신이지만 성격이 온순하기 그지없다. 전사의 후예라 하기엔 전체적으로 뭔가 허술해 보였다.
처음 그를 만나고 난 후 마사이족에 관심이 생겨서 인터넷으로 마사이족을 검색해 봤더니 아주 흥미로운 얘기들이 많았다. 마사이라는 이름에 숨겨진 재미있는 신화와 전설, 성인식으로 사자를 사냥하는 것, 하늘을 향해 스프링처럼 점프하는 풍습... 자존심이 아주 강한 종족이라 열강 제국의 아프리카 정복 시기에 노예로 끌려가느니 자살을 택해 총을 앞세운 침략자들도 이들만은 쉽게 정복하지 못했다고 했다.
Haraka haraka haina baraka! 하라까 하라까 바이나 하라까!
빨리빨리하면 복이 없다!
이 재미있는 마사이족 속담은 느릿느릿한 내 친구 마사이에게 딱 어울렸다.
“그런데 마사이족은 인사를 어떻게 해?”
“음. 반가운 친구에게는 침을 뱉지!”
"What?!?!"
정말 그랬다. 마사이족은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 침을 뱉어 주면서 ‘촉촉한 축복’을 기원하는 아주 독특한 인사법이 있다. 건조한 기후에서 살아가는 그들에겐 침이 마치 영롱한 아침이슬처럼 느껴졌나 보다. 사실 상상만 해도 아찔하다. 친한 친구가 된 우리가 초원에서 인사를 나눴다면 아마 서로의 얼굴에 침을 뱉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생각해보면 저나 나나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초원이 아니라 현대식 공장이라는 굉장히 낯선 장소에서 만난 셈이다. 외모로 보자면 나도 그다지 아프리카에 어울릴만한 사람은 아니니...
정말 우리는 도시 이방인과 외국 이방인으로 참 어색한 장소에서 만났다.
누군가 마사이족이 ‘인류의 원형’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러나 신세대 마사이족은 확실히 이전의 그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소똥으로 지은 집보다 훨씬 튼튼한 벽돌로 지은 집이 있고 안정적인 직장과 평안한 정착이 있는 화려한 도시의 달콤한 유혹은 맹수처럼 초원을 누비고 이슬 같은 물 한 모금을 나누어 마셨던 순수한 그들도 피해 가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대초원에 자연 국립공원을 조성한다는 국가정책으로 울타리 밖으로 밀려나 갈 곳이 없어 도시로 향해야만 했다.
어떤 경우에는 정부의 무분별한 농지개발로 물이 고갈되어 버렸다.
반경 수 킬로미터에 물이 사라져 버렸다. 하루아침, 그들은 모든 걸 잃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초원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또 향해야만 하는 사람들...
결국 종착지는 낯선 이방의 도시다.
인생을 가르는 운명의 날카로움은 그 누구도 피해 가지 않는다.
너나 나나 그 사나운 운명에 상처 입은 영혼.
그렇다. 우리는 모두 상처 입은 영혼들이다.
조금 다름에도, 서로를 안고 위로하며 살아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 오늘, 운명에 상처 입은 영혼들을 위하여 -
게이트 쪽문을 열고 공장 밖으로 첫발을 내디디니 어제와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혹시나 채용될까 하는 마음으로 자리를 깔고 있던 사람들 자리에는 그저 한산한 바람만 살랑살랑 불어왔다. 읍내 시장까지는 비포장 길을 따라 걸어서 한 20분 거리. 천천히 걸어가면서 주변 풍경들과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니 이곳에 온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지만 낯설었던 풍경과 현지인들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도 그럴 것이 매일 공장에서 천 명씩 얼굴을 마주하니 빨리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카자흐스탄에서도 느꼈었지만, 사람들 생김새와 고유의 문화가 조금 다를 뿐 사람들 사는 모습은 어디나 다 똑같다.
마음이 평화로워진 탓일까?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따뜻한 햇볕과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저 언덕 나무 그늘 아래 해먹을 걸고 요람에 누인 아이같이 낮잠 한잠 자면 여기가 천국일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실 주중에는 공장 안에서만 시간을 보내니 좀 지루했었다. 남들은 좀 위험하다고 했지만 기회가 닿는 대로 주변 마을이라도 많이 걸어보고 싶었다.
“헬로!”
마주 오던 꼬마가 나를 보고 손을 들어 인사했다. 저들에겐 이곳에선 아주 희귀한 동양인이 그냥 마냥 신기한 모양이었다.
떠나보면, 비로소 알게 된다
읍내에 도착해 가벼운 식사로 점심부터 해결하려고 슈퍼마켓과 식당이 붙어있는 마트에 들어섰다. 창가 옆에 앉아서 먹을 수 있는 간이 테이블이 있어서 가볍게 먹고 일어서기 딱 좋았다. 음식 진열대에는 튀긴 감자, 샌드위치, 그릴 치킨 등 꽤 낯익고 먹을 만한 메뉴도 눈에 띄었는데 그중 사모사 Samosa라고 적힌 삼각형 파이가 눈에 들어왔다.
사모사?
카자흐스탄에서 먹었던 중앙아시아 음식 쌈 싸 Samsa와 생김새도 이름도 참 비슷했다. 후진국에서 고기 소로 된 음식은 특히 조심해야 한다. 부패하거나 청결하지 않은 고기를 사용해서 만든 음식을 먹으면 십중팔구 응급실행이다. 카자흐스탄에서 직원 아들이 부패한 고기로 만든 쌈싸를 사 먹고 응급실로 후송되어 목을 뚫고 호흡을 해야 했던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다. 안전하게 감자 소로 된 사모사와 콜라 하나로 요기를 하면서 창 너머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보고 있으니 시간이 잘 갔다. 누가 불구경과 사람 구경이 제일 재밌다 했던가?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는 것도 제법 재미있었다.
주말만이라도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다면...
항상 함께했던 가족과 떨어져 있으니 왠지 더 그립고 함께했던 소소한 일상의 소중함이 느껴졌다. 그때는 마땅히 갈 만한 곳이 없어 주말이면 늘 함께 아바이 공원을 걸었었다. 손잡고 걷고 깔깔거리며 웃고 배고프면 허름한 카페에 들러 숯불에 구운 양고기 샤슬릭 한 꼬치에 행복했던 날들이었다. 그때의 나와 우리가 그리워졌다.
떠나보면 알 거야. 아마 알 거야...
어느새 내 입은 사랑과 평화의 ‘울고 싶어라’의 후렴구를 조용히 부르고 있었다. 정말 떠나보면 알게 되는 것 같다. 머물러 있을 때는 함께 있을 때는 몰랐던 소중한 것들을. 그 작 것들에 묻어 있던 행복을...
콜라 하나도 제대로 못 사는 아프리카 풋내기
기숙사로 돌아오기 전 슈퍼마켓에 들러 한 주간 먹을 아침 식사용 식빵과 버터 등을 바구니에 담았다. 인스턴트커피 한 통도 잊어서 선 안 된다. 커피는 외로움을 달래줄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마지막으로 음료를 사려고 냉장고를 보니 유리병으로 된 1리터짜리 대용량 콜라가 보였다. 특이하게 유리병으로 된 대용량 콜라! 좀 무겁겠지만 첫 만남 기념으로 과감하게 하나 담았다. 콜라를 마실 때도 좋겠지만 저 독특한 유리병에 꽃이라도 한 송이 꽂아두면 삭막한 방에 생기가 좀 돌지 않을까 싶었다.
장바구니를 계산대에 올리니 여직원이 계산을 시작했는데 1리터짜리 콜라병을 나에게 보여주며 뭐라고 말을 했다. 스와힐리어를 못 하니 영어로 설명을 부탁한다고 했는데 자기는 영어를 잘 못한다고 했다. 소통이 안 되니 유리병 병목에 적힌 큰 글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Return for refund - 환급받으려면 반환하시오.’
느낌상 공병 보증금을 얘기하는 것 같았는데, 미리 보증금을 내라는 건지 아님 빈 병을 반납하면 보증금을 주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음... Pass! please.”
도무지 의사소통이 안 되고, 뒤에 줄을 선 사람들 눈치도 보여 일단 빼 달라고 손짓하니 캐셔가 콜라병을 한쪽으로 치우고 계산을 마무리했다. 조금 무안해서 급히 마트를 나왔는데, 생각해보니 콜라를 빼 달라고 할 때 ‘Pass!’라고 했던 게 어찌나 웃기는지... 급하니까 ‘콩글리시’가 나도 모르게 막 튀어나온 거였다. 퀴즈 게임도 아닌데 패스라니... 여하간 아쉽지만, 대용량 유리병 콜라 사기는 실패였다. 아직 나는 콜라 하나도 제대로 못 사는 아프리카 풋내기다.
희망 바나나, 들어는 보셨는지?
돌아오는 길에 노상 과일가게에 들러 바나나를 여섯 개 샀다. 여섯 개에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는데, 하나하나에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이름을 붙여서 일주일을 카운트할 셈이었다. 그리하여 붙여준 바나나의 이름은 ‘희망 바나나’였다. 어쩌다 보니 서른 중반을 넘은 나이에 극도로 유치해져 버렸다. 고단한 하루와 무료한 ‘싱글 라이프’를 나름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바나나가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주말에 가까워진다는 뜻이니 빨리 없어질수록 좋았다.
색이 예쁘고 싱싱해 보이는 망고도 두 개 샀다. 기왕 아프리카에 왔으니 한국과 카자흐스탄에서 비싸거나 귀해서 잘 먹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먹어 두는 게 왠지 ‘본전’을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옆에 잔뜩 쌓여있는 아보카도도 한 번 도전해 볼까 싶었는데 ‘피부가 오돌토돌한 초록 과일’은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포기했다.
숙소에 돌아와 인스턴트커피에 설탕을 듬뿍 넣고 한잔 마시니 오늘은 더 소원이 없었다. 혈관에 넘치는 카페인의 힘! 강렬한 에스프레소로 만든 아메리카노는 이 시골에 살면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할 희망이었다. 저렴한 인스턴트커피 한잔에도 생기는 감사와 만족감. 제대로 적응하며 살고 있긴 한가 보다.
없는 것을 찾지 말고 있는 것을 감사히 즐겨라!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포기’는 그사이 이곳에 살면서 체득한 인생 교훈이었다.
바나나, 바람같이 사라지다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숙소에 들어오면 체력이 고갈되어 무언가를 더 하고자 하는 의욕은 거의 ‘사망’ 수준이었다. 체력 하나는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난 3년 동안 걷는 것 외에는 다른 운동을 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주말까지 얼마나 남았지? 오, 내일이 벌써 목요일이네!
침대에 대자로 누워 고개를 돌려보면 일부러 잘 보이게 옷걸이에 걸어둔 ‘희망 바나나’가 달력을 대신해 줬다. 하찮은 바나나가 주는 삶의 작은 위안.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바나나보다 더 달콤한 주말이 가까워지니 주말을 향한 기대감에 엔도르핀과 행복지수가 조금씩 상승했다.
저녁에 일을 마치고 숙소로 들어갔는데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어. 어디 갔지?’
창문 손잡이에 걸어 두었던 바나나가 보이지 않았다. 목요일이니 바나나가 두 개가 남아 있어야 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날이 좋아 환기한다고 창문을 열어두긴 했지만 숙소가 삼층이라 누구도 올라올 수 없는데 여간 이상한 게 아니었다. 기숙사 아래쪽에는 경비초소가 있어서 도둑이 들 가능성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다른 짐도 살펴보니 바나나 외에는 없어진 게 하나도 없었다. 바나나만 없어진 건 이상하지만 그것만 없어진 건 천만다행이다.
망고 좋고? 체질 따라 다르다
뭔가 달달한 게 당겨서 지난번에 사 왔던 망고를 집어 들었다. 지난 주말 바나나와 함께 샀던 망고는 그야말로 너무 싱싱해서 바로 먹을 수가 없었다. 내가 산 망고는 노란색 망고가 아니라 빨간색, 푸른색, 노란색, 자주색 등 색이 곱고 탐스러운 망고였다. 그 맛이 궁금해서 칼로 살짝 과육을 삐쳐 보았는데 돌덩이같이 단단했었다. 살짝 맛을 보니 그다지 달지도 않은 것 같았다. 정말 대실망이었다.
그냥 버릴까?
도저히 못 먹을 것 같아 그냥 버릴까 하다가 혹시나 싶어 공장 매니저에게 물어보니 그건 ‘애플 망고’라고 하는데 사서 바로 먹으려면 눌러봐서 물렁물렁한 걸 사야 한다고 했다. 그냥 한 며칠 두면 맛이 좋아진다고... 완전 촌놈, 촌티 날렸다.
그가 알려 준 대로 빛이 잘 드는 곳에 며칠 두었더니 제법 말랑말랑해졌다. 씨를 피해 좌우로 빗 껴서 쑥 자르니, 본색을 드러내는 애플 망고의 형광색 노란 속살이 아주 탐스러웠다. 물론 새콤달콤하니 맛도 훨씬 좋아졌다. 문제는 거의 1/3을 차지하는 커다란 씨의 주변 과육을 어떻게 먹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그대로 버리기는 아까워서 아예 큰 씨를 두 손으로 잡고 싹싹 발라먹었다. 그런데 한 십 분쯤 지나서 입 주변이 간지럽고 발갛게 붓기가 생겼다. 한국에서 망고주스나 말린 망고 같은 공산 제품을 먹었을 때는 이런 일이 전혀 없었는데 뭐가 문젠지 알 수가 없었다.
망고 알레르기
답을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바로 망고 알레르기 증상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비슷한 증상을 올린 글들이 올라와 있었다. 심지어는 나처럼 입으로 ‘망고 씨를 핥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나만 그런 게 아닌 것 같아 왠지 안심되면서도 한편으론, 버리기 아까워서 씨까지 싹싹 긁어먹는 ‘공통된 한국 정서’가 어찌나 웃기는지...
망고 씨에 옻나무같이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우르시올’이라는 성분이 많아서, 망고 씨나 씨 주변 과육이 피부에 닿으면 특히 알레르기가 심하다고 한다. 나는 약간의 붓기와 조금 간지러운 정도에서 끝나 다행이었지만, 얼마 하지도 않는 망고가 아깝다고 씨까지 싹싹 긁어먹다가 제대로 병원 신세 질 뻔했다.
알아도 잡지 못하는 도둑, 원숭이
금요일 점심 후 잠깐의 휴식 시간. 동료들과 잠깐 담소를 나누는 이 시간이 일과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었다.
아빠들의 수다라고나 할까? 현지인들에는 따뜻한 햇볕이 그렇듯 우리에게 수다는 영혼의 비타민이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주제로 때로는 진지하게 또 즐겁게 수다를 떨었는데, 해외 생활 중 겪은 ‘동병상련’의 이야기와 일과 중 각 공장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사건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늘은 내가 먼저 어제 없어진 바나나 이야기를 꺼냈다. 3층에다 문도 잠겨있었는데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했더니, 한 동료가 혹시 창문을 열어둔 게 아니냐며 귀신같이 딱 맞췄다.
“그거 원숭이가 가져간 겁니다. 바나나만 가져갔다면 다행이네요.”
자기도 입사하고 얼마 안 돼서 겪었던 일이라고 했다. 야생 원숭이들이라 사람이 있을 때는 접근을 안 하는데, 자리를 비우면 슬쩍 다녀간단다. 이런 발칙한 XX들!
바나나나 송이채 걸어서 보관하면 잘 무르지 않고 바닥 접촉으로 인한 갈변이 적어 그 싱싱함이 오래간다고 한다. 나는 옷걸이를 유용하게 사용했다.
한가한 토요일 읍내로 향했다. 오늘은 듬성듬성 지저분하게 자란 머리를 좀 정리할 계획이었다. 다른 동료들은 나이로비 시내에 있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미용실을 이용한다고 했다. 나는 짧은 머리라 옆과 뒤쪽만 조금씩 정리하면 되니 굳이 멀리까지 갈 필요가 있을까 싶어 읍내 현지 미용실을 이용해 보려고 마음을 먹었다. 읍내 메인 사거리 모퉁이에서 ‘Barbershop이발소’라고 적힌 조그만 간판을 본 기억이 있어서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간판만큼이나 작은 이발소에 들어서니 아주 낡은 이발용 의자 두 개와 거울밖에 보이질 않았다. 역시나 시설은 아주 허술했다. 두 자리 모두 현지인들이 머리를 깎고 있었는데 이발사가 둘 다 여자였다. 여자 이발사라... 왠지 ‘섬세하고 깔끔하게’ 잘라줄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다.
“하바리!” 들어서면서 인사를 건네자 두 이발사가 동시에 나를 쳐다봤는데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사실 그간 수없이 많은 한국 매니저들이 이 공장을 지나갔지만 누구도 읍내에서 머리를 깎지 않았다고 하니, 나의 등장은 이발사들에게도 전설이 될 만한 일이었다. 일단 대기석에 앉아 있으라고 손짓해서 벽을 따라 만들어둔 좁고 긴 의자에 앉았다. 내가 들어온 이후로 두 이발사는 가끔 뒤를 돌아 나를 보면서 스와힐리어로 대화를 나누다가 또 피식 웃기도 하기도 했는데, 느낌에는 저 동양인 머리를 누가 깎을 것인지 정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아서 앞머리는 다듬어 주고 옆머리와 뒷머리는 완전히 짧게 잘라 달라고 영어로 주문했다. 거울에 비치는 이발사의 표정을 보니 잘 이해를 못 한 것 같았는데, 역시나 웃으면서 영어를 잘 못한다고 했다. 다시 한번 두 손을 이용해 얼마나 자르면 되는지 머리카락을 잡아가면서 설명을 해주었는데 그제 서야 알겠다는 듯 “오케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한국 사람 머리카락 잘라본 적 있어요?”
“아니요. 처음이에요.”
역시 이 이발소 역사상 한국인 손님은 내가 처음인 것 같다.
‘어차피 짧은 머리니 대충 잘라도 적당히는 나오겠지...’
전기이발기를 잡은 이발사는 옆머리부터 자르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윗머리 쪽으로 올라갈수록 균형이 안 맞는 것이었다. 아무리 봐도 이건 너무 이상하다 싶어 목 앞으로 둘러친 천속에서 손을 꺼내서 “여기 조금, 저기 조금” 하면서 다듬어 주기를 요청했는데 처음에는 “오케이, 오케이” 하면서 조심스레 자르더니 몇 번 더 수정을 요청하자 이발사의 안색이 점점 굳어져 갔다.
“좀 더 짧게 부탁해요.”
“더 짧게?”
균형이 안 맞는 앞머리와 윗머리를 조금씩만 더 쳐달라는 말이었는데 이해를 잘못한 건지 일부러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이발사의 이발기가 앞머리 쪽으로 깊숙이 밀고 들어왔고 순식간에 쥐 파먹은 머리가 되어버렸다.
헉! 망했다...
이건 도저히 수습이 안 될 것 같았다. 마음에 썩 안 들더라도 그때 멈췄어야 했는데... 완전 제대로 한 방 먹었다.
“후... 그냥 다 밀어주세요.”
“(이제 와서) 다 밀어달라고요?”
딱 보기에도 짜증이 난 이발사는 이발기 커버를 교체한 후 신속하게 온 머리를 깎아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깎는데 삼십 분 이상 걸렸는데, 채 오 분도 안 되어 ‘반삭발’로 완전 깨끗하게 마무리되었다. 군 초년 생활 시절에도 이렇게까지 짧게 자르지는 않았었다. 이발사의 완전한 승리였다.
‘Barbershop 바버샵’에서 완전 ‘바보’가 됐다.
이미 다 끝난 일. 허탈하게 웃으면서 일어나 머리카락을 털고 옷을 챙겼다. 이발 비용을 지급하려고 하니 처음 말했던 가격의 두 배를 달라고 했다. 시간도 오래 걸렸고 몇 번이나 다시 깎았으니 두 배를 줘야 한다고... 아이고... 이럴 땐 영어도 참 잘했다.
숙소로 돌아오는데 머리로 스치는 바람이 더욱 시원했다. 자꾸 헛웃음만 나왔다. 손이 자꾸 머리에 가는데 하필이면 오늘따라 모자도 안 쓰고 나왔다. 내일 파트 매니저에게 가발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해서 써야 하나?
What happened, Mr. Woo? (뭔 일 이래? 우 매니저?)
공장 게이트를 들어서니 경비가 머리를 가리키면서 웃었다. 좀 전에 멀쩡하게 나갔던 사람이 반삭발하고 왔으니 경비가 놀랄 만도 했다. 그냥 웃으면서 별일 없다고 손짓하고선 숙소로 얼른 들어가려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골프 카트를 타고 공장을 한 바퀴 순찰하고 오시는 전무님과 딱 마주쳤다.
‘아! 왜 하필 이때에...’
“머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살짝 놀라신 전무님께 여차여차해서 의도치 않게 이렇게 되었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인상을 찌푸리시면서 한마디 하셨는데 가슴에 비수로 꽂혔다.
“그래도 그렇지 이 사람아! 머리를 가지고 장난을 치면 되나? 반항할 나이도 아니고!”
“아, 그게 아니라...”
전무님은 내 대답도 듣지 않으시고 못마땅한 듯한 표정으로 가던 길을 가셨다. 뭐 더 할 말이 없었다. 숙소로 올라가는 길에 당직 근무를 서던 선배도 한마디 던졌다.
“야 ~ 시원하게 깎았네! 무슨 일 있어?”
월요일 출근 날부터 일주일간은 “무슨 일 있어?”라는 질문을 끝없이 받았다. 천 명의 공장 직원들은 주말을 지나 갑자기 반삭발하고 나타난 매니저의 심경에 무슨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해했다.
아! 정말 새됐다...
가끔은 ‘대세’를 따르는 안전한 선택도 괜찮은 것 같다.
특히, 이런 소소한 일상에 관한 것들이라면...
첫 번째 우기에 접어들다
11월. 비가 쏟아지는 우기에 접어들었다. 한 번씩 구름이 몰려와 비가 쏟아 내리기 시작하면 정말 겁나게 들이부었다. 보통 아침에는 맑게 개지만 아침까지 비가 이어질 때는 우산이나 우의가 없이 비를 맞으면서 출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멋이 아닌 비용의 문제였다.
밤새 내린 비로 비포장 길이 질퍽해지면 또 다른 출근 전쟁이 벌어졌다. 진흙 길을 걸어온 사람들의 신발에는 마치 소보로 빵의 ‘소보로’같이 흙덩이가 잔뜩 묻기 마련인데 공장 청결을 위해 신발과 발을 씻고 공장에 들어가느라 수도꼭지 쟁탈전이 벌어졌다. 조금이라도 더 깨끗하게 씻고 들어가려는 사람과 빨리 비키라고 엉덩이를 밀며 재촉하는 사람들이 뒤엉켰고 간혹 싸움으로 번지는 경우도 있었다. 매니저나 경비가 나서서 말리지 않으면 머리채 잡고 뜯을 기세였다. 평소엔 늘 웃고 온순한 사람들인데 문제나 분쟁이 생기면 목숨 걸고 싸우는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모기, 하찮은 살인자
날이 따뜻해지고 비가 자주 내리기 시작하니 공장 안에서 쓰러지는 직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구토하러 공장 밖으로 뛰어나가는 직원들도 늘었는데 바로 아프리카 최악의 풍토병 말라리아 때문이었다. 생산 공정 특성상 절반 가까운 사람들이 서서 근무했다. 어느 날은 더워진 날씨만큼이나 열기로 가득한 공장을 부지런히 돌아보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장에 달린 커다란 전등이 떨어진 줄 알고 소리가 난 현장으로 뛰어 가보니 기절해서 바닥에 쓰러진 인원을 동료가 둘러업고 사내 의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말라리아예요.”
놀라 어리둥절한 나에게 파트 매니저가 말라리아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날 처음 내 눈으로 말라리아 환자를 봤다. 말라리아의 주요 증상이 39도가 넘는 발열과 빈혈. 말라리아로 치솟는 열에 자기도 모르게 기절하며 쓰러진 것이었다. 사실 이들은 추위보다 더위에 강한 사람들이니 이 정도 열기가 문제 될 일이 아닌데, 말라리아로 급속히 치솟는 열이 문제였다. 이후로는 말라리아로 매일같이 몇 명은 제자리에 주저앉거나 쓰러지는 경우가 있어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말라리아 환자들은 의무실에서 응급조치를 받고 충분히 휴식하다가 상태가 호전되면 본인 의사에 따라 자리로 돌아왔다. 스스로 빨리 자리로 돌아오려고 애썼는데 혹시나 자리를 오래 비우면 건강 문제로 해고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렇지 않았지만 그만큼 중요한 일자리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부스럼 되는 일을 만들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상태가 심각한 경우에는 응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후송되거나 자진 조퇴를 하고 며칠을 출근하지 못했다. 그중에는 안타깝게도 아예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간간이 있었다.
예전에 아내가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고열과 현기증으로 쓰러졌는데 정말 죽다가 살았다고 얘기했을 때는 뭐 그런가 보다 싶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살면서 한 번도 말라리아 환자를 본 적이 없었으니 체감이 안 될 수밖에 없었다.
나도 한국에서 말라리아약을 처방받아왔다. 의사 선생님이 케냐로 간다고 했더니, 말라리아 고위험지역이라며 일단 걸리면 굉장히 고생하니까 모기 조심하라고 당부를 했었다. 사실 그때도 그런가 보다 했었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막상 매일 같이 쓰러지는 사람들을 보니 이게 정말 고통스럽고 심각한 풍토병이라는 것이 실감됐다.
무엇이 죽음의 말라리아조차 극복하게 하는가?
한 날은 업무가 시작되자마자 쓰러진 직원이 있어 급히 조치하고 공장으로 돌아왔는데 답답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해서 담당 매니저에게 불만 아닌 불만을 토로했다.
“저렇게 열이 나고 아프면, 집에서 약 먹고 푹 쉬어야지. 왜 굳이 출근해서 쓰러지지?”
“당신도 알다시피, 출근하지 않으면 회사로선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고, 며칠씩 무단으로 결근이 이어지면 해고되니까요.”
“그건 나도 알지. 그럼 전화를 하면 되지 않나? 말라리아로 병가를 요청한다고... 나중에 그 증명으로 병원 진료기록이라도 가져오고.”
파트매니저는 내가 아직 ‘현지 물정’을 모른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미스터 우, 전화기조차 없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요. 어쨌거나 출근하고 나서 쓰러지면 병가로 처리되고, 그럼 며칠을 쉬거나 치료하고 올 수 있잖아요. 그래서 아파도 무조건 와야 해요. 그리고 당신이 병가 확인 서명을 해 주잖아요. 치료 후에 다시 올 수 있도록...”
한 방 맞은 것 같았다. 전화기조차 없을 것이라곤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장기 결근을 하는 인원이 있어서 왜 이 사람은 출근 안 하는지 물어봤을 때, 매니저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도 전화번호를 모른다고 했었다. 그게 전화기 자체가 없어서 그랬을 거라곤 미처 생각을 못 했다.
매니저는 말이 나온 김에 끔찍한 현실을 몇 가지 더 알려 주었다. 어떤 이들은 돈이 없어 말라리아약을 사지 못하고 값싼 해열제로 버티다가 결국 죽음을 맞게 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더 문제는 가짜 말라리아약이 판을 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주로 동아시아와 중국에서 수입되는 약들 중에 가짜 약이 많다고 했다. 그러니 현지에서 말라리아약을 구할 때는 특별히 주의하라고 했다.
경악스러웠다. 가짜 말라리아약을 생명을 담보로 팔다니!
공장을 돌다가 그가 서 있던 빈자리를 보니 마음이 짠했다.
오늘 저 직원도 쓰러지더라도 출근해서 쓰러지려고 죽을힘을 다해 여기까지 걸어왔겠지?
세계 보건기구(WHO)의 말라리아 리포트(2019. 12월)에 따르면 2018년 한 해만 말라리아로 인한 사망자는 405,000여 명으로 추산되며 그중 절대다수에 가까운 94%가 아프리카 지역에서 발생하였다. 안타깝게도 사망자 중 67%에 달하는 약 272,000명이 5세 미만의 아이들이었다. ‘인류애’ 차원에서 많은 관심과 치료 약품 등 인도적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다.
덧붙여, 우리나라는 2019년 기준, OECD 국가 중 말라리아 발생률 1위라고 한다. 말라리아는 상용화된 예방 백신이 없음으로, 아프리카 여행 중 가장 주의해야 할 풍토병 중 하나이다. 의사들도 ‘모기를 피하라’보다 더 확실한 예방법은 없다고 하니 아프리카 여행 시에는 일정을 고려해 모기 기피제를 넉넉히 챙겨야 한다.
참고로 또 다른 아프리카 풍토병 ‘황열’도 모기를 매체로 한다.
이곳에 온 지도 벌써 2개월이 훌쩍 넘어서고 있다. 카자흐스탄에서 체화된 생존본능은 또 다른 낯선 환경에서도 강력한 생존력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곳에서도 어느새 현지인 못지않은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중 가장 의미 있는 것은 ‘흑색’이라는 컬러의 장벽을 극복한 것이다. 요즘은 오히려 이들과 함께하는 생활이 평안하다. 아무래도 매일 같이 살을 맞대고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인종과 피부색’이라는 경계를 넘어서게 된 것 같다. ‘매니저-직원’이라는 수직적 관계를 넘어선 친구 같은 사람들도 생겼는데 개인적인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돕는 사람들을 보면 이 들 속에 가득한 온정이 느껴졌다.
야간 순찰을 돌 때면 불쑥 나타나 놀라게 하는 경비도 익숙해졌는데 처음에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 어디선가 나타나 방긋 웃으며 인사하는 경비 때문에 정말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주먹이 나갈 뻔했다. 지금이야 아무렇지 않지만 깜깜한 밤 옅은 달빛에 반사된 하얀 치아와 눈 흰자위만 반짝이면 그 위압감은 정말 상상 이상이었다.
공장 직원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천명 가까이 되는 직원들을 다 기억할 순 없지만 그래도 절반 이상은 눈에 익혔다. 사실 이들이 중국인, 일본인, 한국인을 구별 못 하는 것처럼 아무리 자주 봐도 정말 그 얼굴이 그 얼굴 같았다. 케냐에도 많은 종족이 모여 사는데 우리 공장에는 '끼꾸유 족'과 '키시 족'이 아주 많았다. 얼굴을 보고 출신 종족을 맞추는 건 아직 어렵지만 생김새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도 배워가고 있다. 입사 첫날 사수가 말했던 ‘관심’은 정말 인간관계의 정수인 것 같다. 결국, 깊은 관심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틈틈이 공부하고 있는 스와힐리어도 조금씩 늘고 있고 업무상 꼭 필요한 말 정도는 할 수 있게 됐다. 스와힐리어는 러시아어를 공부할 때보다는 훨씬 빠르고 쉽게 배우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제대로 한 번 고생을 하고 나니 다른 언어도 제법 쉽게 익혀지는 것 같다. 언어 천재가 아닌 이상 노력은 필수지만...
생활 반경도 꽤 넓어졌다. 주말을 이용해 공장 주변 마을 둘레길을 몇 시간씩 걷는데 살아 있는 케냐를 볼 수 있어 너무 좋다. 어떤 동료는 너무 겁 없이 돌아다니는 것 아니냐고 걱정을 했지만 다행히 매번 무사히 돌아왔다. 야생 바나나 숲, 그 유명한 케냐 커피 농장 그리고 그곳에서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만남들... 지나가는 나그네 같은 나에게 손을 내밀어 주고 멀리서 손을 흔들며 반겨주었던 현지인들... 이 모두가 참 신선하고 따듯하고 소중했던 경험과 기억들이다.
케냐에서 지낸 지난 2개월을 평가하자면 ‘생존’ 합격이다.
하나. 혼자는 외롭다. 친구를 많이 만들어라.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그 유명한 아프리카 속담을 기억하라.
둘. ‘적극적인 포기’를 선택하라. 없는 게 많고 불편한 것도 많다.
익숙하던 것들이 그리울 때마다 그간 마땅하게 누려왔던 문명의 이기에 감사해라.
셋.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지 못할 것을 구별하라.
의외로 생사를 가르는 것이 음식과 물이다.
아무리 급해도 잘 살펴서 먹고 마셔라.
넷. 밤에는 나서지 마라.
아프리카는 살아있는 사파리다.
인간을 공격하는 ‘인간 맹수’는 주로 밤에 활동한다.
다섯. 작고 하찮은 것들을 조심해라.
교통사고로 죽는 것보다 모기나 진드기에 물려
말라리아나 열병으로 죽을 확률이 더 높다.
여섯. 그들의 언어를 배워라.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
인사나, 도움을 요청하는 말 정도는 익혀 두는 게 좋다.
일곱. ‘하쿠나 마타타’는 절반만 믿어라!
문제없다는 말은 습관성 발언이다.
정말 문제가 없어서 없는 게 아닐 수 있다.
If you want to go fast, go alone. If you want to go far, go together.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 아프리카 속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