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직과 상처

by 박상영

퇴근길 술잔을 기울이던 나의 아저씨(tvN드라마)가 쓸쓸하게 말한다. “경직된 인간들은 불쌍해.” 일상에서 경직된 사람들은 어떤 모습일까. 편견은 나쁜 것이라고 부정하면서 온갖 편견에 파묻혀 아무렇지 않게 사는 사람들처럼 내 삶도 경직된 인간으로 살아온 건 아닐까.


내가 살며 느끼는 ‘경직’은 공감과 감수성의 문제다. 슬픔과 고난을 내 처지와 과거 기억으로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불쌍하다. 웃음으로 힘겨운 시간들을 위로하는 자리에서 헐거운 자존감 때문에 유머 잃은 감수성으로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불쌍하다. 타인의 시선과 평가로 자기를 바라보고 전전긍긍하며 끝내 자신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불쌍하다. 그렇게 넘쳐나는 경직된 사람들이 경직된 모임과 조직을 이끌며 사회를 숨 막히게 한다. 과연 시시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경직된 풍경을 만드는 것일까. 경직된 ‘가족 관습 교육 사회’ 들이 작정하고 경직된 괴물들을 만들어서 경직된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유지시키는 것은 아닐까.


다시 나의 아저씨는 이야기한다, 상처에 대하여. 상처는 경직을 낳는다. 아픔을 넘어서지 못하는 세상의 모든 상처는 결국 인간을 경직으로 내몬다. 경직된 인간은 사람과 사물과 세상과 화해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적대적인 진지 안에 가둬버린다.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살아있을 생명체의 관계가 단절되니, 미움으로 채워진 몸과 마음은 시들게 된다. 세상의 상처란 고스란히 인간의 한계와 욕망에서 비롯된다. ‘가난 애정 고독 욕심’의 길과 숲을 지나며 누구나 상처를 입는다. 패배가 분명할 상처와의 싸움이지만 마지막까지 저항한다. 경직이란 저항의 흔적이고 상처에 대항하는 무기다. 왜 경직된 인간이 불쌍한가. 본능에 충실한 지독한 싸움이 불쌍해진 까닭은 무엇인가.


상처는 상처를 만나 위로받는다. 경직과 경직이 만나 더욱 불통하고 파괴적인 경직이 될 수도 있지만, 경직의 상처와 아픔이 또 다른 경직의 상처를 이해하고 아픔에 공감할 수 있다면 경직은 더 이상 불쌍하지 않은 유연한 힘이 된다. 적대와 긴장 없이 조금은 더 따뜻해지고 편안해지는 힘 말이다. 나의 아저씨가 안타까워했던 상처 가득한 여주인공이 증오의 옥탑방에서 나와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으려면 공감하는 감수성으로 상처를 어루만져야 한다. 이미 세상은 너무 살벌하고 사람들은 분노에 차있다. 다시 연결된다고 행복해지지 않겠지만, 가여운 삶들일지언정 소박한 유머와 작은 감동으로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다면 위로가 되리라. 소설가 한강이 세상에 보내온 따듯한 목소리, ‘왜 그래,가 아니라 괜찮다’며 나의 상처가 당신의 상처를 향해 마음을 열 수 있다면, 상처들로 경직된 세상에서 그래도 살만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