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by 박상영

친구의 낙원

‘난 낙원에도 가봤지만 나에게 가 본 적은 없다.’ (영화 <너는 여기에 없었다>)

어릴 적 친구가 이민을 떠난 뒤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중후한 느낌으로 먼 길을 찾아왔다. 반갑게 내 손 잡고 정답게 눈 맞추며 묻는다. “상영아, 영생을 믿니?” 황망하게 세상 떠난 아내의 기억들로 헝클어진 삶도 힘겨운데 아득한 생을 그리워할까.


영원한 생명

길에서 강도 만나 피 흘리는 이를 외면하지 않고 돌본 사마리아 사람 썰說은 종교를 떠나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기를 쓰고 영생을 얻겠다는 평범한 사람들을 깨우치려는 비유이고, 몸과 마음과 목숨을 다해 사랑하라는 메시지다. 한 마디로 관 뚜껑을 미는 힘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인데, 영생을 갈망하는 미망의 율법교사는 ‘내 이웃이 누구죠?’ 염장을 지른다. 이 질문은 단박에 지금 여기에서 실존적인 물음으로 나와 당신의 멱살을 움켜잡는다.


낯선 이웃

예수시대 이전부터 사마리아사람들은 더러운 피를 품은 상종 못할 이방인으로 취급되었지만, 주류사회 밖 하찮은 이들이 영생을 꿰차게 된다는 것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영혼까지 팔아서 내 이웃 찾기 숨바꼭질을 해봐야 영생은 아득할 뿐이다. 예수시대에 사람 취급 못 받던 사마리아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대 어디라도 쉽게 만날 수 있다. 불결한 존재로 거대한 인도를 떠받치는 불가촉천민(untouchable)이 21세기 환생한 사마리아인이 아닌가. 강대국의 힘과 소수의 권력과 보이지 않는 돈은, 허술한 국경과 역사적인 민족과 고유한 문화를 사마리아 지역과 불가촉천민으로 갈라놓았다. 반쪽 한반도에도 온갖 나라 불법체류자들과 북조선에서 온 수상한 이방인들이 어색하게 동거하고 있다. 누가 나와 당신의 이웃인가.


여리고 가는 길

자기만의 삶이 있고 상처가 있다. 삶의 귀천이 고기 등급처럼 나뉠 수 없고, 누군가의 상처가 신분이나 처지로 업신여겨질 수 없다. 이 시대의 여리고 가는 길은 운명처럼 짊어진 알 수 없는 삶의 길인지 모른다. 제각기 꿈꾸고 흩어지는 분단의 땅에서 만나는 불편한 이웃들은 영생의 삶을 열망하는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강도나 도적이 들끓는 위험한 길은 가지 않았고,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살았다면 다행히 영생에 다가설 수 있을까. 다국가 다문화 다양성 복합사회에서 살아야 할 격동의 시대에 ‘내 이웃이 누구냐’는 당연하고 익숙한 질문을 바꿔야 한다. 나와 사랑하는 이들이 지금 여기에서 잠시라도 행복하게 살 수 있으려면, 가 본 적 없는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될 수 있을까’


낙원의 슬픔

‘물 잔에 빠뜨린 각설탕’(소설가 한강) 같이 흐리멍덩하고 아리송하고 헛헛한 ‘당신과 나의 여리고 가는 길’에 영생이란 게 가당키나 한 건지, 후회와 번민으로 거듭 자주 차오르는 인생 황혼의 계절에 영생永生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건지, 영원히 살면서 소박하게라도 기억되지 못하는 고통을 어찌 감당하려는 건지 나는 알 수 없다. 피 흘리는 이웃은커녕 몹쓸 강도조차 없을 낙원에서 홀로 살아남는다는 슬픔을 그댄 정녕 아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