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소설가 D. H. 로렌스가 제시한 ‘아이를 교육하는 방법’은 선문답이다. 제1 원칙: 아이를 그대로 두어라, 제2 원칙: 아이를 그대로 두어라, 제3 원칙: 아이를 그대로 두어라. 그는 이 말의 참뜻을 알았을까. 교육 비전공자임에도 30년 넘게 교육자로 살아온 내게 풀기 어려웠던 실천 원칙이었다. ‘그대로 두어라’는 교육을 현실에서 어떻게 실현해야 하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경쟁과 생존과 조국의 영광을 위하여 대한민국 교육훈련소라 해야 할 학교에서 전투적으로 학습해 온 나와 당신에게 교육이라는 단어가 심히 거슬린다면
이렇게 바꿔보자. ‘아이를 사랑하는 방법’, 하지만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방식이 어떤 것인지 고르디우스의 매듭 풀기는 마찬가지다. 1991년 이후 몰두해 온 대안교육 현장에서도 그대로 두라,는 화두는 긴장과 시행착오로 뒤엉켰다. 뜻을 같이 하는 동료 교사들 간에 무책임과 방임이라는 논쟁으로 대립했다. 학생들은 자기 방식과 의지를 내세우며 팽팽한 기싸움으로 학생권리의 진지를 구축하곤 했다. 국가 교육의 나침판 역할을 하는 교과서는 식민시대부터 길들임과 순종을 위한 정략적인 도구였다. 교과서에 국가가 채워 넣었던 군인(반공)과 경찰(애국)을 힘겹게 몰아냈지만 그 자리에 민중을 넣어버린 정의로운 욕심은, 타자가 강요하는 부자연스럽고 억지스러운 또 다른 강제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입시교육의 비정함과 비인간적인 음모에 맞서 대안적인 교육을 찾아 나섰던 배움의 길 역시, 참과 거짓의 이분법으로 공교육에 대항했던 적대적인 교육의 한계에 머물고 말았다. 결국
성공과 행복의 길 위에서 길 찾기를 이끌고 일방적으로 결정해 주는 현명한 부모 교사 기성세대의 역할이 교육의 본분일 수 없다. 신경 생리학자 에릭 캔들은 ‘작품의 표현이 모호할수록 해석은 더 흥미로워진다’(EBS 다큐프라임)고 했다. 자신조차 알 수 없는 잠재된 가능성의 길을 깨쳐가는 삶의 길은 섬세하게 설레고 후회막급으로도 막지 못할 만큼 매혹적이다. 자기 길을 찾을 수 있게 (나대지 말고) 지켜보고, 선택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우도록 (조용하게) 돕고, 길 찾기에 지쳐 낙담할 때 (과시하지 않고) 격려하는 말들과 어긋나지 않는 실천이 교육과 사랑의 본질이다. 살아보니 내 안의 삶이거나 내 밖 타인의 삶은 여러 갈래 종잡을 수 없는 길들이었다. 내가 선택하고 결단한 길은 나만의 기질과 특별한 시대 조건과 독특한 환경에서만 온전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부모 교사가 살아온 길을 자식과 학생이 잘 따르고 이어가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일 수 없다. 길과 또 하나의 길들이 평등하고 따뜻하게 만나 권력의 관습질서 밖에서 자유분방하게 엮이는 것이다. 내가 살아온 길이 배우자나 자식이나 후배 제자의 길보다 옳고 우아하고 도덕적이라는 생각은 독선이고 아집이다.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방식’은 감추어져 있는 가능성의 길들을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성립한다.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할 타인의 길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누구나 선함과 악함, 과거와 미래라는 양면을 지녔다. 사랑한다면 양면 모두를 받아들여야 한다.’(영화 <투어리스트>) 그대로 두라,는 교육과 사랑의 방식은 한 인간이 지닌 양면 모두를 받아들여야 비로소 생기를 띤다. 허나 양면의 모순에 갇혀 죽을 때까지 질퍽이면서 타인의 선함과 악함을 받아들인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그이가 지나왔을 과거와 알 수 없는 미래를 존중한다는 게 얼마나 버거운 일인지 수많은 사랑들을 지나며 뼈저리게 느꼈다. ‘홍어 댕기는 길은 홍어가 알고 가오리 댕기는 길은 가오리가 안다’(영화 <자산어보>) 했는데, 어찌 거친 바닷속 홍어의 길에 간섭하고, 깊은 어둠 소용돌이치는 가오리의 길을 이끌겠다는 건지.
살아있는 순간을 주저함 없이 느끼고, 눈치 보지 않고 사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뚜벅뚜벅! 사뿐사뿐! 어쩌면 사부작사부작!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길을 찾고 선택하고 자기답게 설계하도록 돕는 것이 ‘그대로 두는 교육’이고 ‘그대로 두고 보는 사랑’일진대, 그렇게 살지 못한 내 길이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