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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Oct 17. 2019

셋넷은 무엇으로 사는가

길 위의 학교, 셋넷학교 이야기 (17)


겨울, 기이하게 탄생한 셋넷 학사일정

셋넷 학사일정은 초, 중, 고교 각각 1년 과정 3학기 제도로 운영되었는데,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에 고민하다 태어난 기이한 제도다. 2009년 2,914명의 탈북자들이 남한에 들어왔고, 이들 중 대략 17% 정도가 청소년들이었다.(2012년 김정은 집권 이후 탈북자 수가 절반으로 급격하게 줄어들기 시작했다./통일부 홈페이지) 국정원 심사와 하나원 적응교육과정을 거쳐 남한 정착을 시작한 탈북자들 중 공부할 시기를 놓친 탈북 청소년들이 수시로 제도권 밖 학교를 찾았고, 친구 여럿이 기웃거리다가는 얼마 후 아무런 이유나 설명 없이 사라지곤 했다. 아이들이 몰려오면 일단은 반가웠지만 다음 날에도 나타날는지 밤새 조마조마하게 기다려야만 했다.   

   

셋넷과 성격이 유사한 학교들은 교육부로부터 인가받지 못했지만, 검시를 통해 단기간에 학력을 얻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는 대안 선택교육이었다. 그래서 20대 전후 단신으로 탈북한 청소년들이 많이 찾았는데, 생활이나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고 술 담배와 애정관계들이 자유롭다 못해 방종에 가까웠다. 짧지 않은 탈북 기간을 거치며 억압받지 않고 불규칙적으로 생존했던 습관도 강했고, 사람에 대한 불신과 남한 사람에 대한 의심들이 마구 뒤엉켜 도무지 자신들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그럼에도 학력취득을 위해 제도권 교육내용을 공부해야 했고, 국가에서 시행하는 검정고시를 통과해야만 했다. 검시는 년 2회 4월과 8월에 시행되었다. 뒤처진 공부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과, 돈을 벌어야 한다는 심정과, 자유롭게 놀고 싶다는 몸의 유혹이 날마다 따로 엇갈리며 떠다니는 아이들을 짧은 시일 내에 검시에 합격시키기 위해서는 학기 단위를 가능한 짧게 설정해야 했다. 게다가 취업 스펙을 목적으로 효율적인 봉사활동 흔적을 남기고자 했던 대학생 자원교사들을 주축으로 운영해야 했던 열악한 재정문제도 발목을 잡았다.     


새로운 교육환경과 때늦은 공부를 해야만 하는 아이들에 맞춰 국가시험을 준비해야 한다는 현실적 절박함으로 학사일정과 교육내용을 채웠다. 1년을 3학기로 구분하고 각 학기 목표를 정했다. 1,2학기는 검시 합격이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지만, 3학기에는 셋넷이 하고자 했고 셋넷만이 할 수 있었던 공연, 여행, 커리어스쿨 등 대안교육으로 커리큘럼을 연결시켜 정교하게 운영했다. 


2009년 4월 검정고시 마친 뒤 변산 마을에서 지역문화체험과 여러 봉사활동을 했는데, 고향을 떠올리며 작업을 즐거워했다.


1학기 1~ 4월 / 검시(학력취득), 기초학습, 봄 캠프(2주), 봄방학(1주)

2학기 5~ 8월 / 검시(2차), 문화예술교육, 커리어스쿨(예비 직업교육 1차), 여름캠프(2주), 여름방학(1주)

3학기 9~12월 / 커리어스쿨(2차), 진학 준비 집중학습, 겨울방학(2주), 졸업식 및 졸업여행(2월) 

셋넷 현장체험 특별활동 / 10-11월(창작극 공연, 전국 지역 탐방 문화소통 활동), 년 1회 국제교류 봉사활동. 

* 검시 교육을 위한 교재구입비 부담이 컸는데, 매번 검시 전문기관 <애드윌>의 장학지원을 받았다.


학기를 시작하기 전과 마친 뒤에 반드시 교사모임을 가졌다. 대체로 대학생 중심으로 젊은 자원교사들이 참여했는데, 두 가지를 늘 반복해서 이야기하곤 했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교사를 넘어서서 교육봉사를 마친 뒤에라도 새로운 가족이 되어달라는 부탁이었다. 대부분 가족이 해체된 아이들에게 형, 누나, 삼촌, 고모, 이모, 아저씨 같은 마음과 태도로 만나주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봉사한다는 생각이 교사 활동 중에 오히려 정반대 느낌으로 바뀔 거라고 장담했는데, 거의 대부분 평가모임에서 예외 없이 자신들의 변화된 심정을 털어놓았다. 대부분 자원봉사 교사들은, 숨 막히는 폭포에 흠뻑 젖어 정신 줄을 놓아버리고 마는 12년의 살인적 입시교육에서 살아남은 서울의 주류 대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촌스럽고 불쌍하게 생각했던 탈북 청소년들과의 만남과 교류를 통해, 즐겁게 주고받으며 나누는 것이 배움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셋넷이 하고자 했던 3학기 수업들을 아이들에게 설득하기 위해서는 1,2학기 중에 반드시 검시에 합격시켜야 했는데, 기초가 부실하고 남북한 교육내용이 너무도 다른 교육조건들 때문에 매우 어려운 도전이었다. 실제로 검정고시 공부 내용들이 남한에 적응하고 정착하기 위해 필요한 현실적 지식과는 상당히 괴리가 있어서 동기를 부여하느라 애를 먹었다. 게다가 종교 중심 교육을 하던 개신교 탈북 청소년 대안학교들이 셋넷의 다양한 배움과 낯선 활동들에 대해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험담(노는 학교로 애들 타락시킨다는)을 하염없이 쏟아냈다. 그럼에도 매 학기 질적으로 뛰어났던 60여 명의 자원봉사 교사들이 정성을 다해 탈북 대안학교 검정고시 최고의 합격율로 매번 보답했다.


검정고시 수업을 하다보면 재밌는 일들이 종종 일어나곤 했는데, 아이들이 4지선다형 문제에 정말 취약했다. 나는 중고과정 도덕 수업을 주로 했는데, 문화재를 보호하는 방법을 묻는 문제를 설명할 때였다. 보기 중에 문화재를 팔아서 보호할 돈을 마련한다, 에 정답 체크를 하고는 왜 이게 틀렸냐고 따져 물어서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북조선에서는 국가 차원에서 이런 일들을 당연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남과 북이 평화와 통일로 가는 과정에 일상에서 당연시하는 수많은 상식들의 모순과 충돌로 빚어지는 긴장과 갈등을 어찌 감당할 수 있을까 한숨짓곤 했다.     


학력취득과 남한 적응을 위한 다양한 배움들을 소화시키느라 셋넷 아이들은 다른 학교에 다니는 탈북 청소년보다 정신없는 학교생활을 해야 했지만, 분명 이들의 몸과 마음은 쑥쑥 진화했다. 특히 현장에서 보고 느끼고 체험했던 기억들이 스스로 감당해야 할 문제 해결 능력을 높여준 것은 분명했다. 졸업 후 대학이나 직장에서 또래 탈북 청소년들보다 월등한 역량과 자신감으로 뛰어난 평가를 받았던 졸업생들이 찾아와 고마움을 간절하게 표현해서, 함께 수고하고 고생했던 자원교사들과 뿌듯한 회식자리를 자주 가졌다.   

   

봄, 영등포 자유 총 연맹과 스파인 2000

4월과 8월 검정고시가 끝나는 날에는 시험을 치른 재학생뿐만 아니라, 수고했던 자원교사와 졸업생들이 모두 학교에 모여서 밤새 축하파티를 헸다. 검정고시 결과는 통상 한 달 후에 나오지만 시험이 끝나면 저녁 6시경 교육청 게시판에 정답을 올리기 때문에, 미리 답을 적어 나오게 해서 그날 저녁 파티 중에 합격여부가 바로 나왔고, 그래서 파티는 어느새 합격 축하파티로 이어졌다. 보통 40~50명 정도가 모였는데, 파티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주로 애들이 좋아하는 삼겹살 파티를 했는데, 이 문제를 매번 해결해준 산타가 스파인 2000 왕태윤 회장이었다.


왕회장은 젊은 시절 교통사고를 당해 머리를 제외한 온몸이 마비된 중증 장애인이었지만, 자신의 운명에 굴하지 않고 봉사단체를 꾸리고 직접 진두지휘하며 놀라운 일들을 지치지도 않고 해냈다. 그가 셋넷을 어찌 알았는지, 시험 마칠 때마다 아이들이 삼겹살을 실컷 먹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왕회장과 함께 이 단체를 이끌던 이가 그 유명한 원조 댄스그룹 클론의 강원래였다. 그 역시 사고로 하반신 장애지만 개의치 않고 또 하나의 삶을 기획하고 거침없이 해 나갔는데, 원주 학교 시절 찾아와 차량이 없어서 애를 먹는 것을 보고는 순식간에 돈을 모금해서 조용하게 선사해주었다.  

   

셋넷을 운영하며 일체의 정치적 색채나 활동을 개입시키지 않으려고 신경을 썼다. 개인적 이념성향과 공적인 학교 운영이 섞이지 않고 가급적 열린 구조로 누구나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랬다. 한반도 평화나 통일이 특정 이념집단의 전유물이 아니라, 구성원 전체의 뜻과 의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럼에도 종교적 근본주의나 극단적 성향의 이념을 지닌 사람들은 아주 단호하게 배제했는데, 아이들과 셋넷교육활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지켜야 하는 신성한 임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유 총연맹이라는 단체는 신성한 임무로 막아야 할 이념적 바이러스가 분명했다. 반공 역사와 분단고착 전통의 산실이라 할 이 단체 영등포지부가 셋넷 당산동 시절 6년간 점심식사를 해결해주었으니, 삶은 정말 오묘하고 아이러니했다. 지부에 소속된 분들은 아이들에게 어머니뻘 되는 분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하루도 거르지 않고 조를 짜서 매일 같이 점심과 저녁식사를 준비해주셨다. 아이들과 교사를 합치면 매일 30명 정도 식사량이라 결코 만만치 않았지만, 필요한 음식재료를 사다 드리면 생활의 달인들은 물 흐르듯 음식을 만들어 맛있는 집밥을 만들어 주셨다. 자유 총연맹의 재발견이었다.    


2010년 해남에서 3주간 머물며, '오작교프로젝트-알면 사랑한다'는 주제로 공연 직업체험 봉사를 다양하게 진행했다.  


여름, 별똥처럼 쏟아지는 공모사업

셋넷이 매년 해냈던 그 많은 일들을 지켜보며 많은 이들이 궁금해했다. 그만큼 예산이 필요했는데, 2월쯤 사업공모가 일제히 공고되면 사업기획서를 만들어서 경쟁과 심사를 거쳐 선정되었다. 정부부처(행안부, 문광부, 통일부, 여가부)와 여러 공공 단체들에서 공모사업을 통해 소외 계층에게 필요한 일들을 돕기 위해 공적 기금을 내놓았다. 셋넷은 단체 공모사업에 거의 모두 빠짐없이 선정되어 한국에서는 더 이상 신청할 곳이 없으니 외국에서 지원하는 국제사업으로 눈을 돌려야 하는 게 아니냐는 농담을 할 정도였다. 그만큼 셋넷의 기획력과 프로그램은 독창적이고 특별했기에 심사위원들을 사로잡았다(고 전해진다).    


공모지원 사업단체 꽃이라 불리는 트리플 크라운이 있다. 행안부, 사회복지 공동모금회, 삼성 고른 기회 장학재단 이 세 곳에서 공모사업에 선정되는 단체는 사업 기획력과 사업역량을 공공연하게 인정해주었다. 셋넷은 이 세 단체에서 3년간 연속 사업에 선정되고 우수사례발표까지 하는 단연 차별화된 성과를 보였다. 특히 셋넷에서 사업 후 만들어내는 결과물들은 공모지원단체 사업담당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왜 같은 돈을 지원하는데 셋넷은 이런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다른 단체들은 못하느냐는 얘기들이 들려오곤 했다(고 전해진다).


인쇄물(보고서, 사진자료집)과 영상 결과물들을 매우 수준 높게 디자인하고 내용을 채웠는데, 셋넷을 돕는 문화자원교사들의 독보적인 질적 수준이 이런 현상들을 가능하게 했다. 매년 10개 이상의 공모사업을 신청해서 모두 다 선정되었는데, 웬만한 단체들은 1~2개 정도 선정되는 게 일반적이어서 별의별 소문과 수군거림에 시달렸다. 학교장이 학벌과 연줄로 공모사업을 가져간다는 허황된 3류 소설들이 심심찮게 떠다녔다. 오죽 이해가 안 되면 그랬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건 한 인간에 대한 모독이자 신성한 조직에 대한 모욕이다. 비영리 시민운동을 한다는 이들 역시 사적인 시기심과 질투를 감출 수 없었나 보다.   

   

공모사업에 선정되어 여름과 가을에 걸쳐 풍성한 활동을 했던 것은 좋았지만, 공적 자금에 대한 책임과 의무 때문에 연말 연초까지 하얗게 밤을 새워야 했다. 한 해 마지막 날 교사들과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덕담을 나누는 송년의 자리에 불쑥 전화가 왔는데, 강철 여인 미숙샘이었다. 공모사업들 보고서와 지원금 결산을 하느라 한 해 마지막 날 밤에도 학교에서 일하고 있는 미숙샘 때문에, 놀라움과 미안함과 감동이 마구 뒤섞였다. 셋넷에서 모든 일들을 기획하고 진행한 건 나였지만 미숙샘이 마무리해야 비로소 완성이 되었다. 2005년부터 2018년까지 한결같이 셋넷 살림을 맡아온 그녀를 자원교사들은 매우 안쓰러워했다. 일하기 까다롭고 피곤한 박망채와 같이 일한다는 것에 안타까움과, 오래 버티고 있다는 것에 대한 경이로움으로 늘 위로하곤 했다.  

     

가을, 돈 없는 학교장과 은행 지점장

교육활동이야 공모사업으로 채워간다고 하지만, 그 외 학교에 필요한 것들이 많았다. 교육에 필요한 기자재, 시설 보완, 아이들 심신을 안정시켜데 필요한 소소한 것들이 여럿이었다. 모두 예산이 필요했는데, 은행 지점장들 도움을 정말 많이 받았다. 이미 설명했고 다 알다시피 학교장과 학교는 가난하다. 그럼에도 은행 지점장들과 거래를 한다? 그 지점장들은 학교 동창이거나 군대 동기들이었다. 나보다 덩치가 더 크지만, 일본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에 나오는 순한 사슴 같은 인상을 지닌 황광범은 기꺼이 운영위원장을 맡아 궂은일을 해주었던 대학과 군대 동기다. 장교생활을 했던 군 생활 덕분에 알게 된 동기들 여럿이 제대 후 은행에 취업해서 내가 하는 일과는 상관이 없을 줄 알았는데, 셋넷을 하면서 이들의 도움을 넓고 깊게 받았다. 은행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기자재들과 컴퓨터를 교체했는데 꽤 쓸 만했고, 지점장 동기들은 그중 괜찮은 것들을 챙겨 보내주었다. 그리고 때마다 은행 직원들과 함께 영화, 야구장, 공연 등을 체험한 뒤 맛난 것들로 여가생활이 가난한 셋넷 아이들을 즐겁게 해 주었다. 가끔 선발된 직원이 와서 은행 시스템과 경제교육 특강을 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한민국에서 의무적으로 군에 다녀와야 하는 남자들로서는 군대생활이 좋은 기억일 수 없지만, 적어도 난 군대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2012년 2월 8회 졸업식, 졸업하는 아이들을 축하하고 수고한 교사들을 기억하는 풍성한 문화행사로 채웠다. 


다시 겨울,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졸업식과 장학금

셋넷은 학생 숫자가 많지 않지만, 졸업식은 성대하고 공을 들였다. 시설 좋은 장소를 찾고, 내부를 근사하게 꾸미고, 후원자와 교사와 졸업생과 학부모들이 참여해서 거창하게 치렀다. 존중받지 못한 채 훌쩍 커버린 아이들에게 무한한 축복과 격려를 기억하게 해 주기 위한 의도된 기획이었다. 그래서 다른 졸업식과 달리 졸업식 순서도 다채롭고 화려했다. 졸업생 공연은 물론 후원자와 자원교사들의 축하무대도 빠지지 않았고, 춤과 노래와 웃음으로 넉넉한 축제의 자리였다. 


졸업하는 아이들을 격려하기 위한 장학금을 마련해야 해서 늘 가까운 사람들을 성가시게 했지만 모두들 기꺼이 봉투를 마련해주었다. 독립군 후예인 젠틀맨 정철승 변호사가 후원회장이 되어 분위기를 잡아주었고, 흰 도포자락 휘날리며 멋들어진 연주를 하는 한국식 오카리나 창시자 김준모 샘은 거리공연으로 모은 돈을 장학금으로 흔쾌하게 내주었다. 중학 동창들도 체면을 세워주느라 정성을 채워서 늦깎이 졸업생들을 격려했다. 오리지널 대구 사투리를 마구 구사하면서도 자기는 사투리 쓰지 않는다고 우겨대는 대구의 딸 박주연쌤은, 대구에서 가져온 떡과 음식들로 셋넷 모든 행사들을 채웠고 두툼한 봉투도 매번 건네서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    


비빌언덕 내 동생

한 살 아래 유일한 동생이 있다. 대학시절 연극에 빠져 있을 때, 동생은 노래에 푹 빠졌다. 노래를 참 잘해서 당시 종로 3가 음악클럽에서 돈 받고 노랠 부르며 틈틈이 자작곡 노래를 여러 곡 만들었는데, 훗날 사업을 하면서 음반까지 냈지만 가수의 길로 들어서진 않았다. 노랠 잘한다는 이유로 묻지도 따지지도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셋넷행사에서 노래를 불러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 행사 뒤풀이에 남아서 늘 계산했다. 해마다 졸업식에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봉투 몇 개를 만들어 졸업하는 아이들 장학금을 만들어주었다. 형만 한 아우 없다고 했지만, 내겐 형보다 나은 아우가 있었다. 동생은 나와 셋넷이 맘 놓고 비볐던 포근하고 든든한 아름다운 언덕이었다.   


2007년 여름 남도 캠프, 모두들 소망을 담아 닿지 못하는 부모와 고향땅으로 훨훨 떠나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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