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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Dec 12. 2019

교사일기, 슬픔의 강을 건너는 법

길 위의 학교... 셋넷학교 이야기 (21)


셋넷학교 교장 판공비

창작 뮤지컬 준비로 한창 연습을 하던 중에 반가운 전화를 받았다. 1995년 처음으로 대안학교를 만들고 함께 꾸려가던 동지이자 벗의 목소리가 반갑게 들려왔다. 남한 부적응 청소년들을 위한 따또학교(따로또같이만드는학교1995~2001)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7년 만에 좌초하게 되자, 상실감 때문이었던지 우리 만남은 지친 마라토너들처럼 비틀거렸다. 아주 가끔 술잔을 나누거나 낯선 나라 여행 중 우연히 만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는 늘 그렇듯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놀랍게도 결혼을 하였다.    

오랜만에 마주친 술잔 너머 어눌한 목소리와 어색한 눈짓이 여전했다. 서로 끊긴 채 흘렀던 시간의 공백을 이리저리 들추다 그가 불쑥 말했다. ‘셋넷학교 교장선생님은 판공비 같은 거 없나요?’ 대답 대신 쓴웃음만 지었는데, 100만 원이 들어있는 두툼한 봉투 하나를 어색하게 내밀었다. ‘이거 학교 통장에 넣지 마시고 학교 문제 때문에 사람들 만나거나 일을 하실 때 편하게 쓰셨으면 좋겠어요.’ 

함지훈.. 상명대 부속여고 베테랑 영어교사. 확실한 강원도 사투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구사하는 빼빼 마른 미술평론가와 그 날 술을 많이 마셨다.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판공비라는 것을 받은 날이었다.     

     

발리에서 지은 샘이 보내온 편지

지난겨울, 고모를 떠나보냈다. 60년간 두 딸의 생사를 모르고 살다가 돌아가신 할머니의 애환과, 전쟁 중 너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내 아버지의 슬픔과, 전쟁이 던져준 변화로 생긴 정서적 상처를 그대로 끌어안고 무던히도 애썼을 고모들의 아픔이 나의 유전자에 새겨져 있다. 

유학시절 사회적 이슈들이 내 개인 문제로 환원되기 어려웠던 이국 생활에서 갈증과 소외를 많이 느꼈다. 그때 셋넷 곁으로 가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내 가족사의 얽힌 매듭을 푸는 일이자 내 개인에게 유전되어 내재되어 있는 매듭을 푸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탈북자들 곁으로 가게 되었던 것, 그리고 이 사회 면면에서 디아스포라 정서를 발견하고 사진 작업을 하게 되었던 것은 필연적이거나 그저 우연일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제 우리 이웃으로 살아가는 이들과 연대를 이루어야 한다. 지난 역사의 매듭을 풀어내고 과거와 화해하고 건강한 미래를 향해 현재를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기에 셋넷의 실험은 더없이 소중하다. 


2007년 네팔 카트만두 모노하라 학교 국제봉사활동 중 운동회, 안경호샘 태한성샘 신수명샘  


셋넷 피터팬

그가 셋넷에 온 것은 2005년 늦가을쯤이었다. 그의 방문은 뜬금없었다. 잘 나가는 입시학원 강사였다는 이력이 그랬고, 적지 않은 나이에 대안학교를 해 보겠다고 달려든 무모함이 우람한 덩치만큼이나 놀라웠다. 대안교육 강의를 하고, 대안학교를 하겠다는 문의와 상담을 받아온 터라 친절하고 자상하게 이야기를 건넸을 뿐, 다시 다급한 셋넷 일상으로 돌아왔다. 한 열흘쯤 지났을까, 또다시 불쑥 전화를 했고 학교 근처 싸구려 횟집에서 많이 어색해하는 그와 마주했다. 소주가 빠르게 오가고 별로 말이 없던 그가 황당하게 내뱉었다. ‘선생님, 절 거둬주십시오.’ 순간 어리둥절했고, ‘제가 뭘 거둬야죠?’ 조폭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대사가 9,900원 광어회 위로 휘익 지나갔다. 그와 나, 그와 셋넷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는 소리 없이 셋넷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녔다. 검정고시를 볼 때,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입학절차를 밟을 때, 제주도 뜨거운 바람 속, 아이들이 히말라야 흰 산을 오르며 힘겨워할 때, 난생처음 올빼미 수업을 하고 일요일 새벽을 맞이할 때, 현장체험학습을 마치고 돌아오는 고단한 버스 안에 그가 늘 함께 있었다.      

친구, 인디언 말로 친구란 ‘나의 슬픔을 등에 진 너’라는 뜻을 품고 있다. 셋넷이 떠났던 수많은 캠프와 여행길에서 그는 아이들 친구였다. 무대 위에서 춤추고 노래하면서 그는 셋넷 친구였다. 내 기억 속 그는 교사라는 사회적 틀을 넘어선 좀처럼 보기 힘든 탈북 아이들 친구였다. 그랬던 그가, 셋넷 피터팬이었던 그가 떠났다. 그를 지켜주는 요정의 정체를 끝내 알아채지는 못했지만, 그만의 소중한 요정과 함께 또 다른 삶을 아름답게 엮어가기를 소망한다. 잘 가시오 셋넷의 영원한 친구 태한성샘, 부디 안녕히!    


통일의병 정영수의 간절한 기도

학생 수가 점점 줄어 학교를 유지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셋넷학교의 원주행 결정을 지지한다. 셋넷학교가 원주로 옮긴 까닭은 아이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해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셋넷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은 대부분 대학교를 가게 된다. 시험 없는 특별전형으로 입학 문턱이 낮다. 그런데도 아이들 대학 졸업률은 엄청나게 낮다. 12년간 대한민국의 경쟁적 교육으로 단련된 남한 아이들 속도와 능력을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학교 안에서 아이들은 자기 정체성과 힘겨움을 온전히 드러낼 수도, 기댈 수도 없다. 학교를 나와도 마찬가지다. 서울이란 화려한 도시 속에서 아이들은 점점 외로운 섬으로 남게 된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우리들에게조차 서울은 삭막한 곳이 아니었던가? 하물며...

원주에서 셋넷은 대학교육이 아닌 직업교육을, 그리고 도시와 농촌이 함께 있는 지역 중소도시가 갖는 자연의 편안함과 지역 공동체의 따뜻함을 아이들에게 주고 싶어 한다. 공연과 여행에서 보여주던 셋넷 아이들의 빛나는 생기가 도시와 대학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원주 셋넷이, 건강하게 지켜지기를 비는 맘으로 두 손 모은다.

영수 샘은.. 세상을 집처럼 여기며 자유롭게 사는 괴짜 국어교사다(양평 전자 과학고). 셋넷과 함께 여행하고, 탈북 청소년을 위한 대안 국어교재도 만들었다. 맑은 기운으로 유유히 세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늘 깨어있다.

   

실컷 퍼주고 뺨 맞는 사람

이라고 오토바이 타는 목사 성표 샘이 비수를 던진다. 그가 던진 비수들이 여러 개 내 안에 꽂혀있는데, 이번 비수는 역대급이다. 실속 없는 삽질의 역사와 전통은 깊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기골이 장대했다. 역도산이 태어났다는 함경도 어드뫼 물과 공기와 흙의 힘을 온몸으로 받으셨다. 피가 뜨거웠고 기운이 급했다. 소리가 크고 우렁차서 기분 좋게 술 마시며 나누는 대화도 싸움처럼 들렸다. 직업군인이셨던 아버지는 평생 자신의 강한 인상과 느낌을 지우고자 애썼다. 게다가 자기 기질을 쏘옥 빼닮은 아들놈을 지켜보자니 기가 찰 노릇이 아니겠는가. 표정을 밝고 온화하게 해라, 소리를 낮게 하고 허릴 깊이 품어라. 자라며 늘 듣던 말이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 말들이 나를 더 강화시켰던 것 같다.      

최전방 수색 중대장이던 아버지가 전쟁 때 설치되었던 오래된 부비츄렙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나는 엄마 뱃속에 있었다. 군 헬기로 긴급 이송된 수도통합병원에서는 가망 없다고 흰 가운을 덮었다는데, 아버지는 기적처럼 일어나 월남으로 향했다. 대체 거긴 왜 급하게 가셨을까? 1년 6개월 전투 중대장으로 임하며 전투 중 사망과 행방불명자 명단에 바삐 오르며 맹활약하셨다. 덕분에 별 소득 없는 훈장들만 주렁주렁 매다셨지만, 4살이던 나는 또다시 죽음과 마주하게 되었다.  

장남 특권으로 서울에서 공부하며 전방 아버지 근무지를 틈틈이 오갔다. 4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어 마장동터미널에서 철원 문혜리로 향하는 시외버스를 탔다. 당시는 철책선 지역으로 향하는 길들 상태가 비포장이고 구불구불 엉망이라 5시간 가까이 가야만 했는데, 마지막 라운드까지 두들겨 맞은 3류 복서처럼 생긴 시외버스가 하도 흔들려서 학교에서 배웠던 것들이 몽땅 뒤죽박죽이 될 정도였다. 관사에 도착하자마자 군 전화로 도착인사를 드렸는데, 대뜸 “불러봐.” 하셨다. 성적표에 한 과목 ‘우’라도 있을라치면 바로 전화를 끊으셨다. 그랬던 아버지가 내 생일날은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긴 손편지에 용돈을 넣어 휴가 나오는 병사 편에 보냈다.  

   

아버지와 내가 운명처럼 짊어지고 있었던 존재의 무거움을 덜고자 고안한 것이 농담이었던 것 같다. 우린 늘 진지했고 분명했고 날카로웠고 완벽해야 했기에 농담은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 여겼다. 문제는 농담의 수준이었다. 아버지는 부대 회식자리에서 쎈 지휘관 이미지를 녹일 겸 자주 농담을 던지곤 하셨는데, 어린 내가 듣기에도 좀 썰렁했다. 아버지를 성찰하며 격조 있는 농담을 하리라 마음먹었지만, 내 농담은 좀 더 한심했다. 기껏 웃긴다는 게 타인의 약점을 농담 재료 삼아 웃기려 했으니, 아무리 본의가 아니더라도 농담거리가 된 상대방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한심한 나를 돌아보고 나 때문에 서운했고 상처 받았던 사람들에게 용서를 빈다.   

 

셋넷 초창기 어려웠던 시절을 저 웃음들로 채웠던 셋넷 전사 거침없던 교사들이 그립다.

     

셋넷의 마더 테레사 미숙샘

‘왜 지금껏 셋넷과 함께 하고 있지?’라는 생각이 문득 들 때면, 셋넷과 함께 낡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셋넷가족이 되고 몇 해가 지났을 무렵, 새로운 직업을 찾아 떠나겠다는 고민으로 방황했다. 그때 교장선생님이 “진정 새롭다는 것은 함께 낡아가는 것이다.”라는 싯구를 인용하며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던졌다. 그 말에 사로잡혀 날마다 새롭기만 한 공모사업 결산 영수증들과 시름하며 낡아가고 있다. 


내 그리운 나라, 행복의 나라

길 위에서 만났던 남북의 아이들과는 그들 부모세대를 훌쩍 뛰어넘는 세대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그들을 하나의 공감대 속에서 소통하게 해 주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악과 가수는 달라졌겠지만, 여전히 그들도 두려움 속에서 음악을 듣고 있다. 내가 자라던 시절보다 훨씬 나은 생활공간 속에서 영양가 있게 자라고 있지만, 자신의 미래를 의논할 부모와 교사들은 부재중이다. 더 이상 자신들 미래를 돌보는 일들이 스스로를 행복하게 해 주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아이들은 자기 삶을 돌보기도 전에 남의 인생을 보듯이 감동이 없다. 폭력과 성적 도착증으로 끈적거리는 컴퓨터 게임과 동영상들로 배려받지 못했던 외로움을 달랠 뿐이다. TV에서는 비눗방울처럼 행복을 날리고 있고, 거리 광고판들은 24시간 쉴 새 없이 행복하라고 강요한다. 최신형 핸드폰을 든 관능적 행복과 만능 카드로 무장한 자본주의의 행복이 우리 일상을 더없이 초라하게 만든다. 아이들은 소통 없는 행복과 선택할 수 없는 행복 속에서 한없이 외롭다.     


30년 전 내가 부딪쳤던 완고하고 권위적인 기성세대 벽 앞에서 현재의 아이들도 여전히 어쩔 줄 몰라한다. 나는 일상에서 존재감을 상실한 아이들을 행복의 나라로 이끌 힘이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 그 나라는 내가 그리워하는 나라이지 아이들이 원하는 나라는 아니다. 삶의 현장에서 교사가 아이들과 나눠야 하는 것들은, 대안적 삶의 방식이지 교사의 대안적 삶 그 자체는 아니다. 아이들과 내가 살아가는 이 도시는 자본주의 시장원리에 의해서 정교하게 숨 쉰다. 우리들이 소망하고 누리는 행복도 자본주의 시장이 허락한 행복의 그림자일 뿐이다. 우울한 사실이지만, 우리들이 목표로 하는 대안적 삶과 세상은 시장의 질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과 함께 대안적 삶의 방식과 공동체 삶의 내용을 끊임없이 실험하고 연습하고 훈련한다.    

대안적 삶을 준비하는 셋넷교육에서 중요한 '문화 감수성'은, 이기적 욕망에 물들어가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따뜻하게 회복시켜줄 소통의 재생능력이다. 문화 감수성이 쌓여 드러나는 창조적 문화수용자 역량은, 경쟁과 탐욕으로 세상을 채우는 천박한 자본주의에 맞서서 보다 적극적인 행동으로 우릴 이끈다. 지속 가능하지 않을 소모를 요구하는 시장의 수동적인 소비자 역할을 넘어서서 일상의 주인이 되어 축제의 삶을 회복시키는 주체로서 거듭나게 한다.     


2016 독일 공연 떠나기 전 국내 공연 마지막 장면, 관객과 함께하는 난장 풍경(여해 문화공간)


슬픔의 강 건너가기

셋넷 아이들이 어릴 적 몸서리치며 지나왔던 상황들을 감히 상상할 수 없다. 그만큼 아득한 기억의 계곡이 아이들과 나 사이에 있다. 나는 다만 슬픔의 강을 함께 흘러가듯 나의 외로움과 슬픔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고, 아이들의 외로움과 슬픔을 기억하고 싶다. 아이들과 함께 평등하고 따뜻하게 만들어가는 행복은 거창하지 않다. 온 하루를 더없이 즐거운 시간과 공간으로 채우는 것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름과 차이들을 우습게 여기지 않고 진정으로 대하는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을 두려움 없이 ‘지금 여기’에서 맘껏 누리는 것이다. 현란한 이론이나 관념에 사로잡혀 몸과 마음이 분열되지 않도록 내 사소한 일상들을 살피는 것이다. 거짓 사랑과 탐욕으로 세워진 수많은 십자가들에 현혹되거나 쫄지 않는 것이다.


때때로 나는 좌절할 것이고 두려움에 휩싸일 것이다. 때때로 아이들은 자신들이 어렵게 선택한 대안적 삶을 고단해하고 도망치려 하겠지만 나는 피하지 않을 것이고, 나를 사로잡고 있는 두려움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아이들이 자신 없어하면서 뒷걸음질 칠 때마다 그들 앞에서 완강하게 버틸 것이다. 소설가 김영하는 다른 이들을 대신하여 '잘 느끼는 사람'이 작가라 했다. 하물며, 미망의 알에서 깨어난 후 교사라는 존재로 줄곧 살아온 내 삶은 보다 잘 느끼는 생이어야 마땅하다. 나와 내 안을 느끼기 위해 이기적으로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며, 남은 시간들은 나를 넘어서서 내 밖의 삶들을 보다 잘 느끼며 살고 싶다.    



*제목 사진.. 2006년 셋넷 첫 여행(백두산-북경-몽골) '기나긴 여정2'에 동행했던 자원교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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