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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Jan 09. 2020

뜨거움과 차가움, 희미해진 그 길 따라...

셋넷학교 이야기를 마치며(23)


나를 지금의 인생으로 데려다 놓은 것은 꿈이 아니었다. 시간 속에 스몄던 지속되지 않는 사소한 인연들, 그리고 삶이라는 기나긴 책무를 수행하도록 길들여진 수긍이라는 재능이었다... 뜨거움과 차가움 둘 다 희미해졌다. - 빛의 과거, 은희경


희미해진 빛의 기억 속 여행자, 선이

미국의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보컬리스트였던 니나 시몬은 자유가 뭐냐는 질문을 받고, '자유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셋넷을 시작할 때 만난 선이가 그랬다. 말과 행동과 감정표현이 똑 부러지게 선명해서 서늘하기까지 했다. 당당했고, 꾸밈없이 솔직했고, 뭐든 뜨겁게 맞이했다. 그래서였나, 인연은 순식간에 흘렀지만 깊고 질긴 기억으로 남아있다. 반도의 서쪽 변산과 남쪽 완도 바다의 빛깔로 온몸을 물들이고는, 짧은 대학생활을 뒤로한 채 옷을 갈아입듯 이 땅을 벗어버렸다. 평양을 떠나 동아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을 거쳐 선이의 기나긴 여정은 유럽에서 멈췄고, 그 사이 길 위에서 만난 운동 만능 남편과 자신을 닮은 두 아이를 지키는 작은 거인이 되었다. 내 평생 두려움과 한계로 갇혀있던 분단 반도를 넘어서서, 선이는 마침내 세계인으로 거듭났다. 진정 자유로운 영혼 반도의 딸에게 평화 있을지니, 그대 행복하여라!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사랑은 천천히 흐른다

원주셋넷시절, 새로운 수업을 기획했다. 마음 살피기.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과 교사 모두가 참여해서 자신의 성정을 살피고 서로의 관계 방식과 소통의 문제를 솔직하게 들여다보는 용기가 필요한 시간이었다. 

수업의 일환으로 진행했던 데카그램(일명 에니어그램)을 통해 자신들의 기질을 돌아보았다. 나는 모두의 예상대로 자기주장이 강하고 주도권을 쥐고 밀어붙이는 행동가 유형이 나왔다. 단도직입적이고 단호하다, 권위 있다, 자신감이 넘치고 성실하다,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안정감을 준다, 남다른 행동력이 있다는 장점도 있지만 유념해야 할 단점들도 많았다. 남을 조정하려 한다, 지나치게 반항적이고 오만하다, 고집이 세다,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자신만의 정의를 너무 추구한다,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자신의 약점과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다, 등등. 교사들과 아이들이 기막히게 맞는다면서 환호했다. 

나 같은 유형 사람들은 일상 속에서 자기 안의 부정적 감정에 주목하면서 자신만의 특질을 긍정적으로 돌봐주는 작업이 필요한데 내게 보완이 되어야 할 유형은, 남을 돕고 싶어 하는 사람, 타인을 도와주다가 자신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다. 이 유형의 장점은 정이 많고 마음이 넓다, 친절하고 세심하다, 사람을 잘 돌본다, 눈치가 빠르다, 다른 사람의 기분을 잘 이해하고 칭찬해 준다. 셋넷에서 만났던 많은 사람들이 지닌 유형이었는데, 어쩌지 못하는 내 기질의 한계와 어리석음을 이들이 감싸주었다. 


논리와 시스템으로 작동되는 세상은 기질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기억하지 말고 순하게 받아들이라고 명령할 뿐이다. 기질, 자기다움, 자기 사랑은 마침내 길을 잃고 도처를 떠돈다. 자신을 만날 수 없으니 나를 사랑할 수 없고 너에게로 다가갈 수 없다. 나를 촘촘하게 에워싸고 있는 기질이 한없이 낯설고 부담스러워 어쩔 줄 모른다. 자신을 은연중에 이끄는 기질을 통해 우연한 생의 사건들과 맞닥뜨리게 되지만 허둥거리다 자기 안에 갇히고 만다. 시시각각 인연으로 맺어지는 모든 빛나는 것들을 사랑했지만, 장님처럼 더듬거리다 사랑을 잃게 되고 시든 사랑의 황폐함으로 가슴을 다친다. 

우리들 기쁜 젊은 날의 골목은 끊어졌고 마당 깊은 집도 사라졌다. 사라진 집 마당에는 설렘을 잃어버린 소통들이 그림자 되어 어른거리고, 끊어진 골목길에는 기질을 상실한 외로운 영혼들만 웅성거린다. 알퐁스 도데의 별 같았던 그대가 잠시 쉬어갈 내 어깨는 이제 앙상하게 말라 위태롭고, 서로를 등불 삼아 삶을 여행할 은하철도는 더 이상 운행하지 않지만,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사랑은 느릿느릿 천천히 흐른다.


2005년 여름 지리산 캠프에서 영옥이와 함께 춤을!


내 심장을 뛰게 했던 두 가지 

’간사(NGO단체 시절 프로그램 스텝)‘는 30대 내 삶을 설명하는 직함이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벗어나 설렘과 감동으로 미친 듯이 세상을 껴안던 그 시절 열정과 무모함을 서슴없이 내게 주련다. 40-50대는 ’교사‘라는 직함 안에 내 최고의 시간들이 다 담겨있다. 미숙 샘이 전생에 나라를 구해서 누릴 수 있는 행운이라는데 축복에 감사한다. 교직생활을 하다 갑자기 돌아가신 할아버지(덕수상고 교장)의 못다 한 삶을 내게서 보셨을 아버지께 온전히 드린다. 새로운 명칭이 생겼다. ’글 쓰는 이‘. 평생 희생과 자기다움으로 나를 사로잡았던 저세상 봄날 엄마에게 마땅히 바쳐야겠다.  

때로 세상의 길을 벗어나 학습되지 않은 자유 때문에 방황할 때, 아비는 당신이 경험했던 합리적 길로 설득하면서 진지함을 촉구했다. 때때로 세속의 길을 벗어나 불확실한 길 앞에서 주저할 때, 벗들은 길들여진 건너편 길에서 내 경솔함을 충고했다. 그럴 때마다 어미는 흔들림 없이 신뢰해주었고, 감당해야 할 힘겨운 현실을 염려하고 당신이 줄 수 있는 지지와 지원을 무한히 베풀었다. 세상의 유혹을 넘어서서 나다움을 기억하는 길 위의 삶은, 조건 없이 베푼 내 어미의 절대적 사랑이 가꾼 생명의 기억들이다. 내 심장을 뛰게 했던 두 가지... '진정성'은 어미가 내어준 길 위에 핀 꽃이며, '감수성'은 어미의 눈물이 길에서 맺은 따뜻한 열매다.  


2014년 겨울, 셋넷 개교 10주년 기념으로 졸업생과 교사들이 함께 걸은 히말라야 랑탕 트레킹.

   

새로운 세상은 오지 않겠지...만, 셋넷의 불꽃은 꺼지지 않으리.

거친 숨을 삼키며 히말라야를 오른다. 몸속에 들어차 있던 저 세상 생각들이 온통 땀으로 쏟아져 내린다. 오렌지보다 붉은 분노에 차 있었고, 늘 완벽해야 했고, 합리적으로 긴장하고 경쾌한 추진력으로 잔뜩 무장해 있었던 나를 새삼 떠올린다. 산에서 걷는다는 건 보기 싫은 나를 돌아보게끔 가혹하지만, 정직해서 좋다.

서울에서의 내 영혼은 미친 듯한 일상과, 형식적인 모임과, 정처 없는 지하철과, 이유 모를 술들로 비틀거렸다. 네팔의 내 몸은 숨차고 가파른 한계를 오르내리며 비틀거리지만, 영혼은 어느새 투명해진다. 휘트먼이 기억했던 것처럼, 미친 일상과 형식적인 관계와 정처 없었던 그 도시에서 기억하는 것은 '거기서 우연히 만나 사랑으로 나를 감금시킨 한 여인일 뿐...' 그녀가 참 고맙다.


따로 또 같이, 함께 가는 길 

온갖 나쁜 기억들로 가득한 현재 진행형 셋넷 아이들에게, 죽기 전에 심장에 새길 행복한 기억들을 남겨주고 싶었다. 착한 기억들이 탐스런 눈송이들로 내리고 아이들이 소망하는 봄이 와서 녹아내리면, 어두운 기억들과 함께 물이 되어 먼바다로 흘러가겠지. 지나간 아픔과 슬픔들로만 감정을 편식하며 삶에 찌들지 말고, 기쁨과 감동과 보람들도 골고루 섞어 '따로 또 같이' 가면 좋겠다.

“얘들아, 피할 수 없다면 어찌해야지?” “맞받아쳐야죠.” 셋넷들이 망설임 없이 답한다. 정녕 피할 수 없는 생이라면, 봄날 소풍처럼 환하고 어지럽게 즐기다 가자구나.     


어둠 속 길 잃은 자들 노래가 빛을 향해 나아가네... 저 불꽃은 꺼지지 않는다네... 저들은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리라... 우리들 행진에 함께 하겠나... 바리케이드 넘어 우리가 바라던 세상이 있지 않겠나?.. 내일이 오면 새로운 세상이 오게 하겠네... 내일이 오면 새로운 미래가 오리라. - 뮤지컬 레미제라블.  



* 난생처음 긴 글을 쓰는 내내 지켜주신 저 세상 부모님과 이 세상 인연들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고마워합니다. 셋넷이야기 시즌 2는 '셋넷의 뜻으로 읽는 영화 이야기'입니다. 2020 새해 격주 목요일 우리 다시 만나요. 굿나잇 앤 굿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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