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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Mar 05. 2020

카트

셋넷 영화이야기 4 : 약속과 신뢰

친하지 않아도 돼. 친절하기만 해도 고마운 일이야.(이항규, 후아유)


큰 아이가 갑자기 직장을 그만 두었다. 하는 일을 편안해하고 자부심마저 느끼는 모습에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입사 10개월 동안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못했단다. 몇 차례나 요구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며 말로 얼버무렸단다. 요즘 세상에 그런 일이 가능할까 의아해했지만 CEO가 요구하는 근로계약서를 마다할 직원이 세상에 없을 테니, 계약서 없이 10개월이나 정상적으로 일을 했다면 반대의 경우가 분명했다

.

영화 카트는 비정규직 엄마와 편의점 알바를 하는 아들의 현실 속 생생한 이야기다.

카트의 아들이 알바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자, 편의점 주인은 이런저런 핑계를 나열하면서 약속한 알바비를 주지 않는다. 유통기한 지난 편의점 음식은 먹어도 좋다고 했지만, 버려졌을 음식들 비용과 자잘한 일들을 들먹이며 딴청을 부린다.  

   

셋넷 북한출신 청소년들이 남한에서 제일 처음 했던 일들이 알바였다.

아이들에게 알바는 쉬운 일이었다. 어릴 적 고향에서 하던 일이 노동이었고, 탈북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온몸을 써야 했기에 일은 전혀 부담 되지 않았다. 꾀를 부릴 필요도 없었고 적당히 하는 요령도 알지 못했다.  


큰 아이가 정식 계약을 요구하고 주말에 일했던 수당과 구두로 미뤘던 임금을 요구하자, CEO는 한 차례 조기퇴근한 일을 뒤적거리고 인간 됨됨이를 상기시키며 주어야 할 돈을 흥정했단다. 큰 아이는 일을 그만두고 여행을 떠났다.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편의점 주인이 하는 인간이하의 짓거리를 참지 못해 카트의 아들을 따라온 여친이 홧김에 돌을 던져 편의점 유리창을 깨버리자, 편의점 주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아들 같고 조카 같다던 고딩 알바생에게 폭력을 가하고 파출소로 끌고 간다. 

북한출신 청소년들을 너그럽게 고용했던 사장들은, 그들의 미숙함과 어설픔과 상냥하지 않았던 태도들을 트집 잡으며 제대로 된 임금을 주지 않았다.     


큰 아이는 상심했지만, 아빠는 아무 것도 도울 수 없어 무기력했고 미안했다.

편의점 주인은 기고만장하며 손해배상을 요구하고, 경찰은 제대로 주지 않은 알바비와 편의점 파손비를 상기시키며 원만하게 해결하라고 중재한다. 곧 정규직이 된다는 회사의 약속을 믿고 열심히 일하다 직장에서 내쫓긴 비정규직 엄마는, 아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아들이 받아야할 정상적인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편의점 주인에게 따진다. 일을 부리고 왜 월급을 주지 않느냐, 묵묵히 일만 하니까 쉬워 보이냐고. 

꿈을 품고 일을 했던 북한출신 청소년들은, 인간 이하 사장들이 하는 짓거리에 대항할 인간 이상의 궁리를 미처 갖추지 못했다.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고 결국 자신이 했던 노동의 대가를 떼일 수밖에 없었다.  

     

1년이 되도록 쓰지 못한 근로계약서 문제로 직장을 그만둔 큰 아이와, 일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한 카트의 알바생 고딩 아들과, 자본주의 세상에서 설레며 처음 일을 하다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했던 북한출신 청소년들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장차 대한민국을 감당할 꿈나무들이 고분고분 시키는 일을 하니까 만만해 보이는가. 늙어가는 대한민국을 되살리고 나라의 존망을 짊어진 희망의 세대들이 묵묵히 일만 하니까 그리도 쉬워 보이는가.      

근로계약서 안 쓰려고 머리 굴리는 CEO들과, 얼마 되지도 않는 알바비 떼먹는 편의점 주인들과, 북한출신 아이들 등 처먹는 인간 이하 사장들에게 묻고 싶다. 너희들은 태어나자마자 CEO가 되었고 편의점 주인이 되고 사장이 되었니? 너희들은 꿈과 행복을 설계하며 설레던 20대 젊은 시절 없이 건너 뛰었니? 몹시 궁금한데... 

대답할 사람, 거기 누구 없소?



* 제목 사진.. 2008년 태안 봉사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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