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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Jun 18. 2020

버닝

셋넷 영화이야기 13 : 자존(自存)과 자존(自尊)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새집 다오!


무엇보다 그걸 용서할 수 없다. 60억이나 되는 인간들이 자신이 왜 사는지 아무도 모르는 채 살아간다. 그걸 용서할 수가 없다. / 핑퐁, 박민규    

 

아프리카 부시맨 부족에는 두 종류 사람들이 있단다. 

물질적 결핍으로 절망하며 배고파하는 ‘리틀 헝거’와, 삶의 의미에 굶주려 고민하고 절규하는 ‘그레이트 헝거’. 해가 질 무렵이면 리틀 헝거들이 낮고 느리게 춤을 추기 시작하고, 밤이 깊어지면서 빈 두 손들을 하늘 향해 간절히 들어 올리며 마침내 그레이트 헝거들로 승화한단다.      


아프리카에서 아주 먼 나라 한국에는 세 종류 젊은이들이 있다. 

빛바랜 추억의 사진처럼 삶과 시간이 멈춰있고 볼품없고 지저분한 비닐하우스가 사방에 깔려있는 서울 변두리 마을 ‘파주’에 어쩔 수 없이 머물게 된 ‘나’. 그곳은 대남방송으로 밤낮없이 시끄럽고 소똥 냄새로 가득하다. 엄마는 어릴 적에 떠났고, 고집불통 아빠는 공무원과 다툼 끝에 옥살이하고 있다. 문예창작을 전공한 ‘나’는 뭔지도 모르는 소설을 쓰면서 배달일로 근근이 버티며 산다.      


오픈하는 가게 배달하다 우연히 만난 ‘나’의 어릴 적 마을 친구 ‘그녀’는 카드빚에 쫓겨 가족에게서 배제되고, 길거리에서 춤을 추며 낯선 여행을 꿈꾼다. ‘그녀’가 잠깐씩 머무는 곳은 풍요와 발전의 상징 남산타워를 볼 수 있는 비탈진 옥탑방이다. '그녀'의 눅눅하고 칙칙한 원룸에는 남산타워 유리창에 반사된 한 조각 빛이 아주 잠시 머물며 위로할 뿐이다.    

   

‘그녀’가 아프리카 여행에서 만난 ‘그’는 강남 한 복판 럭셔리한 곳에 산다. 우람한 소리를 내는 날렵한 외제차를 몰고, 모든 게 완벽하게 갖춰져 있는 주방에서 신에게 바치는 희생 제사처럼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마초를 피면서 밤마다 예의 바른 사람들과 우아한 대화를 나누고 화사한 파티를 연다.      


‘나’가 삶의 무게를 버티는 마지막 거점 파주는 분단으로 인한 분노와 공포가 일상화되면서 세상에서 소외된다. 텅 빈 축사, 비쩍 마른 암송아지 한 마리와 흩어진 가족, 응답 없는 전화, ‘나’의 잠자리는 낡은 소파가 고작이다.

‘그녀’가 잠시 머무는 옥탑방에서 꿈과 희망을 상실한 '나'와의 사랑은 매번 닿지 못한다. 남산타워를 외면한 채 쓸쓸하게 자위행위를 할 뿐이다. ‘그녀’는 ‘나’가 그리워하는 기억 속 온전한 과거다.      

‘그’는 형식적이고 텅 빈 관계들 틈새에서 끝없이 하품을 하고 일상을 지겨워한다. 습관처럼 만나는 여자들을 전시회 그림 보듯 관람하다가, 쓸모없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듯 섹시하게 화장을 해주고는 느낌 없이 버린다. ‘그’는 ‘나’가 욕망하는 꿈속 불안전한 미래다.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저 잘 사는 수수께끼 같은 인간들이 너무나도 많은 이상한 나라 대한민국’에서 살아야만 하는 세 명의 젊은이는, 달팽이처럼 아슬아슬하게 살면서 서로를 연민하고 그만큼 혐오한다. 영화 속 반복되는 삼각형 구도처럼 겉돌 뿐 따뜻하게 소통하지 못한다. 

갑자기 사라진 ‘그녀’의 행방을 쫓으며, ‘그’가 두 달에 한 번씩 태운다는 볼품없는 비닐하우스를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나’는 비닐하우스가 다름 아닌 ‘그녀’였음을 깨닫게 되고, 춥고 흐린 새벽 파주 벌판에서 ‘그’를 태운다. ‘그녀’와 ‘그’와의 기억과 미련을 떨치듯 옷을 벗어 ‘그’와 함께 태우고 벌거벗은 몸으로 떠난다.     

 

‘나’가 태운 것은 젊은 날들의 비루함이다. ‘나’가 태운 것은 젊은 날들의 욕망이다. '나’가 태운 것은 우리 기쁜 젊은 날들의 어제와 내일이다. ‘나’는 비로소 텅 빈 오늘 여기를 받아들인다. '나’는 춥고 두려움에 떨며 떠나지만, 더 이상 헛된 욕망으로 오염된 세상에 노예처럼 갇히지 않는다. 족쇄처럼 얽매였던 ‘리틀 헝거’를 떨치고, ‘그레이트 헝거’의 위대한 여정을 시작한다. 

............

욕망 뒤얽힌 이 시장 속에서

온몸으로 현실과 부딪치면서

관계마다 새롭게 피워내는 

저 눈물나는 꽃들 꽃들 꽃들

....... / 회향, 박노해



*제목 사진.. 2011 임지은 샘과 함께 한 사진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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