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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Sep 17. 2020

연극, 없는 사람들

셋넷 영화이야기 26 : 경계와 생존


세상 끝 절망의 망루 위에 꽃들이 피고 바람이 분다!


21세기 사회는 규율 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과도한 책임과 주도권이 아니라 후기 근대적 노동사회의 새로운 계율이 된 성과주의 명령이다. <피로사회, 한병철>     

무대는 재개발을 위한 폭력적 철거에 맞서는 동네의 마지막 보루 김밥집이다. 철거 대책위원장인 김밥집 주인은 철거용역업체 간부 백 부장의 집요한 회유에 굴하지 않는다. 뜻하지 않은 마찰로 백 부장에게 상해를 입힌 김밥집 주인이 수배에 쫓기고, 머리를 다친 백 부장은 이를 빌미 삼아 김밥집주인 부인과 철거민을 돕는 신부와 신경전을 벌인다.  

    

백 부장은 철거된 집에 몰래 숨어들어 친구와 음악을 듣던 김밥 집 딸을 성추행하고 협박한다. 딸은 새벽 무렵 학교 담을 넘다 실족하여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맞는다. 슬픔의 시간들이 흘러 김밥집주인은 잡혀 감옥에 가고, 법정은 철거 절차에 하자가 있다며 재개발을 무효로 판결한다. 재개발을 주도했던 ‘있는 사람들’과 용역업체가 떠나고 폐허가 된 동네와 ‘없는 사람들’만 남는다. 이들은 망루를 세우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싸움을 시작한다. 망루가 세워진 자리에 있던 김밥집 이름은 천국이다.       


성과주의 노동 계율로 생겨난 ‘있는 사람들’과 ‘없는 사람들’ 사이 경계선이 만든 슬픈 이야기다. 지난 세기 정다운 마을 공동체의 시간들을 추억하는 '없는 사람들'과 극단적 성과사회로 변모한 21세기에 등장한 '있는 사람들'의 대립과 미움은, 어느새 세상을 지배하는 율법이 되어 용산참사와 같은 사회적 비극을 확대 재생산한다.

     

물질의 양극화와 갈라진 신분의 경계에 세워진 망루 위에 ‘없는 사람들’이 꽃들로 피어난다. 때마침 꽃들을 위로하는 바람이 분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는데, 바람에 흩어진 꽃들의 천국은 애타게 사라져 간다. 하늘이 젖고 어두운 망루에 찬 빗방울 떨어지는데, ‘없는 사람들’은 잘 가라는 인사도 잊고 속절없이 사라져 간다. 


삶은 계속되고 눈물을 글썽이며 꽃들은 지고 다시 핀다. 세상 끝 망루에서 ‘없는 사람들’이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고 이웃들과 핏대를 세운다. 누군가는 외계로 떠나고, 어떤 이는 마을버스를 타고 구겨진 골목길을 돌고 돌아 ‘있는 사람들’ 세상으로 바삐 출근한다. 바람이 분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다만 살아남을 뿐이다. 



* 제목 사진 : 2012 셋넷창작극 공연 '나는, 세상을 떠도는 집' 그림자극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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