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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Sep 09. 2020

소수의견

셋넷 영화이야기 25 : 법과 소수


그림자 외면하는 유령 사회, 그림자 무시하는 좀비 나라.


‘다수’는 그림자처럼 ‘소수’와 짝을 이루고 다수결을 합리적 이성이 성취한 신줏단지처럼 받든다. 세상의 모든 ‘다수’는 참이고 윤리적인가. '본 영화는 사실과 무관하다'는 자막으로 시작되지만 시종일관 2009년 겨울 용산참사를 떠올리게 한다. 공감(共感)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우리들 ‘다수’를 돌아보는 이야기가 영화 <소수의견>이다.  ‘소수’는 ‘다수’의 그림자일 뿐인가?     


1년 넘게 농성 중인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아들은 학교를 마친 뒤 철거현장으로 간다. 다수의 적을 진압하기 위한 경찰의 무지막지한 작전 선봉에 용역업체 깡패들이 동원된다. 무장경찰 두 명에게 폭행을 당하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숨어 있던 아들이 뛰쳐나오지만 경찰의 진압 헬멧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다. 아들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가 휘두른 쇠망치를 맞고 경찰 한 명이 즉사한다. 병원으로 후송되던 아들도 숨을 거두며 영화의 갈등은 고조된다.    

  

아들의 죽음을 용역의 과실로 조작하려는 공권력과 진실을 밝히려는 변호사와의 치열한 법정 논쟁이 벌어진다. 다수의 이익이라는 명분을 앞세운 권력의 비열함은 악의 확대 재생산을 통해 구조적으로 순환된다. 권력 쟁취를 위해 함부로 조작하고 선동하는 사람들이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다수’인가. 대의를 위해 ‘소수’가 일방적으로 희생당하는 것이 참된 민주주의인가. 독일의 철학자 아도르노는 변질된 이성인 도구적 이성이 인간을 억압하고 세상을 왜곡시킨다고 비판했다. 도구적 이성에 의해 관리되는 세계는 개인의 자율성과 사회 통합을 추구하기보다 현실의 고통을 은폐한다.(조극훈, 철학이야기)    

 

힘겹게 살아가는 무수한 약자들의 생생한 생명 집단을 ‘소수’라 부르리라. ‘소수’의 삶은 치열하다. '소수’는 무작정 떼를 쓰고 불쌍한 표정 짓고 사회안전망을 위해 격리 보호되어야 하는 잉여 대상들이 아니다. 그림자 ‘소수’는 사람의 가치와 관계의 감동을 재생시키는 공동체 생존의 토대이자 전위(前衛)들이다.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환상 속에서 그림자 ‘소수’를 제거하고 은폐하려는 좀비들이 법의 탈을 쓰고 겁박하고 감시한다. 깨어있는 ‘소수’는 응답하라!  



*제목 사진 : 베를린 장벽 퍼포먼스(2015 독일 통일 25주년 초청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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