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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Aug 27. 2020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셋넷 영화이야기 23 : 길과 만남


다르니까 행복한 길 위의 만남과 사랑


벤치에 앉아도 발이 땅에 닿지 않는 영화감독과 선글라스를 결코 벗지 않는 사진작가가 길에서 만난다. 두 사람은 외딴 시골길과 버스 정류장과 빵집과 댄스 클럽에서 무심하게 지나친다. 닮은 구석 하나도 없는 88세 여감독 ‘바르다’의 흐릿한 시선과 33세 청년작가의 까만 시선이 만나, 프랑스 시골 마을과 도시들을 함께 여행한다. 다름은 튜닝이 안된 기타 줄이지만, 다름과 다름이 만난다는 건 아름다운 연주처럼 위대한 도약이다. 

    

인적 드문 광산촌은 탄광에서 먹던 시커먼 빵 냄새와 작업으로 멍든 몸을 씻던 목욕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철거를 앞둔 집단 거주지 벽에 기억 속 광부들 대형 사진을 전시한다. 그들은 되살아난다. 강과 앙상한 나무, 오래된 사진과 주목 받지 못했던 사랑들. 골동품 양산을 쓰고 마을 벽 거대한 사진이 된 카페 아줌마가 싱그런 웃음으로 낯선 나그네를 반긴다. 줄을 당겨 종탑을 흔들자 죽은 아비가 남긴 종소리가 다시 깨어나 마을을 감싼다.   

  

소금이 쌓인 공장 물탱크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물고기 사진들로 꿈틀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지친 물고기처럼 퇴직을 앞둔 공장 일군의 낡은 얼굴은 주름으로 번진다. 상투적인 노동에 지친 사람들에게 예술은 위로를 건넨다. 해변 유령마을 집 곳곳에 떠난 사람들 사진들이 채워지자, 여름밤 반딧불처럼 살던 주민들 하나둘씩 나타나 왁자지껄 먹고 마신다. 예술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한다.  

    

그림 그리는 못 생긴 우편배달부는 빵과 기름과 소소한 물건들을 배달한다. 그의 가방엔 마을 사람들이 건넨 온갖 과일이 가득하다. 전쟁 잔해로 남은 해변 벙커에는 바다를 그리워하는 소년의 사진이 담기고, 소년은 꿈은 밀려오는 파도에 사라진다. 바다는 옳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옳다. 기억 속 사랑하는 사람들, 보랏빛 옛 친구의 무덤 앞에서 죽음과 두려움을 만난다. 길은 참되다. 모든 죽음과 두려움을 맞이하는 길들은 참되다. 

   

박물관 그림들 사이로 깃털처럼 춤추는 바르다는 자신의 늙음을 정직하게 담는다. 눈, 손, 심장을 닮은 주름진 발바닥까지. 화물차에 붙인 그녀의 눈과 발가락 사진이 어디론가 느릿느릿 떠난다. 상상하는 삶은 즐겁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떠난 여행길, 고독한 창조자였던 기억 속 명감독과 할머니가 된 감독의 설렘은 만나지 못한 채 비껴간다. 완강하게 닫힌 그이의 집 창문에 쓰는 마지막 인사, 우리 이제 뭘 할 수 있지?      


내게 나만의 것이 있듯이, 너만의 이상한 표정과 오래된 습관과 쓸데없는 고집과 불편한 무모함이 있어서 좋다. 사랑하는 당신을 위해 이제 뭘 할 수 있을까? 영화 같은 인생은 마냥 행복하다. 나와 다름을 이어주는 감수성의 우물을 마지막까지 지키는 할머니 감독 바르다는 영영 잠들지 않는 시대의 파수꾼이다. 너와 내가 다르니까 참 좋다.



* 제목 사진 : 1982년 여름, 오대산 계곡 야영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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