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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Oct 15. 2020

어바웃 타임

셋넷 영화이야기 30 : 엄마 2 


아직은 견딜만한 오늘 하루를 위하여!


울퉁불퉁해진 세상에서 균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마다 나는 기억으로 돌아갔다. 유년기와 첫사랑, 청춘 시절처럼 오래된 기억은 천억 개가 넘는 뇌세포 가운데서도 안쪽 깊숙한 데 숨어 있었다. 거기에 언제든 갈 수 있다면 아직은 견딜 만한 것이다. 오늘이 어제의 기억으로 지탱되듯이 현재를 기억함으로써 미래가 만들어진다...  그러니 아직 견딜 만은 한 것이다.- 성석제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찌질이 아들이 21살이 되던 날에 아버지는 놀라운 비밀 하나를 알려준다. "우리 가문의 남자들은 아주 특수한 재능을 대대로 물려받았고 성년이 되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지. 네가 직간접으로 경험했던 기억이나 사건과 장소들로 여행하면서 기억을 바꿀 수 있단다." 아들은 마음대로 시간을 거슬러 오르는 놀라운 비법으로 과거로 돌아가 기억의 내용들을 뒤바꾸게 된다. 시간여행과 개입의 삶을 반복하며 아들은 원하던 사랑을 얻고 가정을 꾸리게 되지만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암 선고를 확인하고 과거로 돌아가 이 상황을 바꾸려 한다. 아버지는 단호하게 거부하고 행복을 위한 아빠의 공식을 전해준다.      


지극히 평범하게 다른 사람처럼 살기. 내 안에 분명하게 스며있는 나만의 경이로움과 기쁨과 설렘과 유머로 별다를 바 없는 하루를 새롭게 채우기. 오랜 기억 속에 멈춰 있는 어린 시절 기억들로 돌아가 평화롭게 머물러 있기. 아버지와 아들의 산책, 한가한 오후 물수제비 뜨기, 바닷가에서의 물장난들은 아무것도 바꿀 필요가 없는 욕심 없는 삶의 시간 여행들. 거실에 앉아 아버지를 많이 바라보고 하찮은 얘기들을 들어주며 찬찬히 이야기하기. 그런 날들은 특별하면서 평범한 오늘 하루다. 시간여행의 마지막 그날은 더 이상 시간여행을 하지 않는 날이다. 꽃이 피고 꽃이 지듯이 주어진 삶의 여행을 고마워하며 욕심 없이 즐기는 것일 뿐.


이야기꾼 성석제의 시간여행도 이와 다르지 않다. 언제든 갈 수 있는 잔잔한 기억들로 아직은 견딜 만한 현재를 아주 특별하면서 평범하게 살아내는 것이다. 어제 들렸던 햄버거 가게 점원에게 잠시 미소를 짓고 지하철에 탄 옆 사람의 음악에 귀 기울이며 발끝을 달싹이는 거다. 매번 반복되는 일상의 일들이 피워내는 작은 성과를 크게 기뻐하고 졸린 눈 비벼 뜨고 우리 아이들의 얼굴을 처음 보는 모습처럼 반짝이며 지켜내는 거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마지막 날들이 떠오른다. 화사한 4월의 봄날이었고 병원으로 가는 길에는 꽃들이 지천으로 흐드러져 있었다. 어머니는 창밖을 보며 눈부신 생명의 축제를 경탄하며 넋을 잃고 계셨다. 내가 다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면 엄마와 함께 봄꽃 핀 거리들을 쏘다니며 꽃구경을 오래도록 하고 싶다. 어둠을 향하는 가여운 불꽃같았던 엄마의 가슴을 꽃의 향기와 빛깔로 채울 수만 있다면 아주 특별하면서 지극히 평범한 하루가 될 테니까. 나는 울퉁불퉁하고 아슬아슬한 세상에서 균형을 잡으려 안간힘을 쓸 때마다 봄날 엄마와의 꽃 나들이 기억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기억 속으로 언제든 갈 수 있기에 아직은 견딜 만하다. 아직은 견딜 만은 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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