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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Feb 11. 2021

크로싱

셋넷 영화이야기 47 : 이방인


대체 뭣이 중한가, 참말로 중한 게 뭐신가. 


바람이 분다. 길 잃은 아이 하나 터벅터벅 걸어간다. 모래바람이 몰아친다. 노을 지는 하늘은 곱기만 한데 아이는 숨을 놓는다. 슬퍼할 무명의 들꽃 한 송이조차 보이지 않는다. 모래톱에 지친 영혼 뉘일 때 더 이상 고통받을 것 없는 아이 위로 별들만 반짝인다. 아이가 좋아하던 축구공과 축구화를 품에 안고 몽골로 찾아든 탈북자 아버지는 싸늘하게 굳어버린 아들의 몸을 어루만지며 오열한다. 아들의 한 줌 몸 가루를 챙겨 비행기에 오르자 마른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쏟아진다. 유난히도 비를 좋아했던 아들이 머나먼 곳에서 슬픔에 젖은 아비를 위로하는 것이리라. 영화 <크로싱>의 마지막 장면이다.       

 

함경도 탄광의 고단함에도 단란하게 살아가는 가족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아내가 폐결핵에 걸린 상태에서 두 번째 아이를 잉태하지만 치료할 약이 없다. 남편은 약을 구하기 위해 무작정 강을 건너고 약을 사기 위해 위험천만한 불법 취업을 한다. 중국 공안에 쫓기다 모아두었던 돈마저 잃어버리고 가난했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난다. 인터뷰를 하면 돈을 준다는 탈북 브로커(중개인)의 유혹에 중국 주재 대사관에 무작정 난입한다. 이들의 기획탈북과정이 TV로 생생하게 방송되고 남편은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아내는 결혼반지를 아들에게 맡기고 고단한 삶을 놓아버린다. 아이는 쉽게 버려지고 두만강을 건너다 잡혀서 수용소에 갇힌다. 조국을 배신한 아빠의 아들은 수용소에서 천천히 소멸되어 간다. 뜻밖의 상황 때문에 원하지 않았던 한국에 오게 된 남편은 다락방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가족과의 재회를 밤마다 꿈꾼다. 고향에서는 구할 수 없었고 중국에서는 살 돈이 없던 약을, 남한에서는 보건소에서 무료로 준다는 사실에 무너져 내리며 북조선에는 없는 하느님을 원망한다. 수소문 끝에 죽은 아내 소식을 듣게 되지만 아빠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가 보낸 뇌물(돈)로 수용소를 빠져나온 아들은 아빠를 만나기 위해 머나먼 길을 떠난다. 몽골 국경에 가까스로 닿았지만 들이닥친 국경수비대 때문에 탈북자 일행에서 떨어져 혼자가 된 어린 아들은 몽골 사막을 헤매다 숨을 거둔다.

   

영화를 함께 보던 셋넷 아이들은 온몸이 눈물로 젖어들었다. 심장 깊숙한 곳에 구깃구깃 품어두었던 날것의 기억들을 마주하면서 온몸이 젖어들었다. 녀석들을 따라 울지 못했다. 그들의 슬픔을 감상적인 연민으로 욕되게 할 수 없었다. 피자를 먹으며 비 오는 거리를 한가롭게 바라보는 남한의 아빠와 아들이, 비 맞으며 축구하는 북조선 아빠와 아들의 기분을 헤아릴 수 있을까. 그들 몸은 펄펄 살아있고 비를 뚫고 환하게 빛난다. 가난한 일상은 비참하지만 아빠와 아들이 나누는 사랑은 가난하지 않다. 자기 인생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 눈치를 보며, 열등감과 경쟁으로 가족의 삶을 채우는 이 땅의 영혼들이 참말로 가난하지 않은가?   



* 제목 사진 : 셋넷 창작극 4 '푸르게 절망을 덮을 때까지' (2011)


* 영화 '웃는 남자'를 권했던 철만이가 다녀갔다. 열네 시간의 일을 마치고 충주에서 남원까지 오는 길이 산티아고 가는 길에 비길까. 아이들 올망졸망 커가고 믿었던 마누라가 자꾸만 낯설어지던 철만이 나이 시절 나도 누군가의 품 안에서 이유 모를 눈물을 쏟았다. 그의 마누라 향이는 셋넷 시절 무대와 기숙사를 사로잡던 마돈나였다. 향이는 배달의 남편 철만이를 통해 텅 빈 남원 냉장고를 가득 채웠다. 인형 같은 향이가 뿜어내는 통 큰 배포는 분단 조국의 아픔을 떠올리게 한다. 철만이는 고단한 하루 밤을 보내고 떠나며 쭈빗쭈빗 봉투를 내밀었다. 아랫사람에게서 받은 생애 첫 세뱃돈이다. 살아보니 복은 눈물겹다. 그저 몸과 마음 평화롭게 새 날들을 맞이하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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