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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Nov 05. 2020

전설의 주먹

셋넷 영화이야기 33 : 시대의 등불


그땐 외롭지 않았다.


“언젠가 우리가 지녔던 모든 것을 놓아버릴 때가 온다. 반드시 온다. 그때 가서 아까워 못 버린다면 그는 잘못 살아온 것이다. 본래 내 것이 어디 있었던가. 한때 맡아 가지고 있었을 뿐인데, 그러니 시시로 큰마음먹고 놓아버리는 연습을 미리부터 익혀두어야 한다. 그래야 지혜로운 자유인이 될 수 있다. ”- 무소유의 삶, 법정 / 이 사람을 보라, 김정남, 두레출판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혼란에 빠졌다. 그 시대의 삶은 집단적인 강요가 사적인 긴장을 압도했다. 가족과 사회정의, 투쟁과 타협, 희생과 외면, 중용의 가치가 자기기만의 회색빛으로 매도되는 현실에서 법정스님은 버리지 말라고 했다. 그냥 놓아버리고 자유로워지라고. 불필요한 것들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진정 행복하다고 했다. 법정은 까까머리 시절 내 인생의 첫 번째 ‘전설’이 되었다. 

     

대학시절, 기존의 질서와 가치와 고정된 틀에 아랑곳하지 않는 거인이 있었다. 그를 가두는 경계와 울타리의 끝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가 가면 낯선 곳도 새로운 길로 열렸다. 성악가의 성가가 거룩하게 울려 퍼지던 교회에서 젊은이들의 통기타 특송을 들려주고 하나님은 편협하지 않다고 일침을 놓았다. 노래방 기계를 교회에 설치해서 입시교육에 찌든 청소년들이 맘껏 스트레스를 풀게 해 주는 게 이 시대 교회가 할 일이라며 젊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렇게 내 삶을 사로잡아 변화시킨 할아버지가 강원용 목사다. 방황과 갈등으로 길을 찾아 헤매던 청춘의 어느 날에 당신은 내게로 와 ‘전설’이 되었다.    

 

어둠의 시대를 밝힌 사람들이라는 부제를 단 책 [이 사람을 보라]는 희생과 고난으로 절망의 시대를 맞서며 길을 낸 고독한 이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시대를 의롭게 살다 간 전설들의 이야기다. 돌이켜보면 탈출구를 찾을 수 없었던 분노의 시절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도 우릴 일깨우고 용기를 주었던 시대의 전설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땐 외롭지 않았다.       


영화 <전설의 주먹>은 무너진 교실, 헐벗은 야산, 후미진 시장통에서 양아치들 위를 종횡무진 날아다니던 전설의 주먹들을 소환한다. 폭력이 난무하는 스크린에 슬슬 지겨워 주리를 틀 무렵, 국숫집 남자 주인공이 왕따 당하는 딸에게 던지는 대사가 나를 깨운다. ‘꿈을 포기하지 마라.’ <전설의 주먹>은 무쇠팔 무쇠주먹이 아니라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시대의 전설들에게 바치는 오마주다. 시대에 적당히 타협하고, 버티는 생활에 지쳐가고, 날렵하던 몸매가 세월에 무너져 내릴 바로 그때 꿈을 놓지 않는 거다. 한때 아끼고 집착했던 것들을 큰마음먹고 놓아버리고 잊었던 열여덟 살 꿈을 다시 붙잡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이 ‘전설’이다.      


정치군인들이 패거리 집단을 모으느라 혈안이 되었던 들개들의 시절이 있었다. 6.25 전쟁으로 갈라진 나라를 다시 하나로 만들자고 군인이 되었는데 파벌이 웬 말이냐며 단호히 거부했던 무모한 군인이 있었다. 우리나라에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다면서 전용차를 한사코 관사에 세워놓고 구보로 출근하던 장군이 있었다. 전두환 신군부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합류를 종용할 때 군인은 오직 나라와 국민만을 위해 살고 죽는 거라며 대책 없이 게기던 아비가 있었다. 나의 아버지 박동원 장군은 그렇게 내 생애 마지막 ‘전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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