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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영 Dec 31. 2020

월터의 상상력은 현실이 된다

셋넷 영화이야기 41 : 체험


아름다운 순간을 만나게 된다면...


주인공 월터는 질문을 받는다. 당신이 살아온 동안 가본 곳은 어디인가요. 당신이 해본 것들은 무엇인가요. 16년 동안 잡지에 올릴 사진을 다루고 착실하게 가계부를 기록하며 살아온 월터는 가본 곳과 해본 것이 별로 없고 상상만 해오던 허전한 일상을 막연하게 더듬는다. 


서울에서 태어나 중산층 가정에서 무난하게 살아온 나는 무말랭이 반찬과 순대를 좋아한다. 무말랭이 무침을 씹다 보면 철길 너머 비포장 신작로가 문득 떠오르고 널찍한 마당에 다다른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빨랫줄에 널려 있던 생무 조각들이 바람결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이 이내 보인다. 내 엄마의 고향집 풍경이다.

셋넷 아이들과 속초 바닷가에 놀러 가서 아바이마을 순댓국을 오지게 먹으며 내 아비의 고향 마을이 어찌 생겼을까 궁금했다. 궁금함은 오장동 함흥냉면집에서 걸걸한 함경도 사투리를 들으며 푸근함으로 바뀌었고, 처음 맛보는 가자미 식해를 고대하던 음식처럼 걸신들린 듯 먹어댔다.       


나와 전혀 상관없던 낯선 지역이 내 안에 오래전부터 살고 있었던 구체적 실체였다는 것을 느낀다. 지역은 체험의 방이다. 그 방은 온갖 음식과 이상한 말투와 어색한 습관들로 가득하다. 부모의 고향 충청도 천안과 함경도 홍원은 그렇게 내 삶과 생생하게 연결된다. 월터는 상상의 일상을 떠나 체험의 현실로 용감하게 발을 내딛는다. 그 순간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월터를 체험으로 이끈 사진작가는 아름다운 순간을 만나면 허겁지겁 담지 말라고 타이른다. ‘아름다운 순간에 잠시 머물러요.’     


셋넷에서 만난 북한 출신 청소년들의 어릴 적 고향 얘기들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고향땅으로 나를 이끈다. 내 가족의 분단을 넘어서려는 상상이 현실이 된다. 우리 모두에게는 기억 속 학교가 있고 운동장이 있고 교실과 동무들이 있다. 내가 직접 머물렀던 아름다운 순간들이 내 안에 살고 있다. 욕심과 미움 없이 머물렀던 아름다운 순간들이, 가본 곳과 해본 일들 없이 점점 비어 가는 뻔한 현재를 견딜 수 있게 한다. 

     

알면 사랑하게 될까.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걸 어떻게 실감하며 살 수 있을까. 내 안에 들어와 생생하게 살고 있는 부모의 삶과 할아버지 할머니의 문화와 습관들을 알아차릴 수 있다면 외롭지 않을 수 있을까. 낯선 이방인의 다름을 용납하고 낯선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평화로울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월터가 상상 너머 마주했던 아름다운 순간들을 만날 수 있을까. 잠시 거기 머물며 행복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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