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상영 Jan 07. 2021

그랜 토리노

셋넷 영화이야기 42 : 공감능력


고도를 기다리며...


한 평생을 살면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산다는 건 축복이지만 고단하고 외로운 길이다. 문득 폭죽처럼 우주를 비행하던 열정이 밤새 꺼지지 않는 모닥불이 되었던 내 젊은 시절이 떠올랐다. 여러 갈래 길을 넘나들며 나를 찾아 방황하던 중년의 도전과 비상은 온통 일과 사람들로 뒤엉켜있다. 초보 노인이 되어 되돌아보는 삶에 대한 성찰은 가슴 시리다. 그렇게 노인은 천천히 만들어진다. 노인이 된다는 건 축복이다.  

    

미국 중서부 작은 도시에 완고한 노인이 산다. 중년의 두 아들도 꺼릴 정도로 깐깐하다. 자유분방한 손주들의 복장과 태도는 매번 할아버지 눈에 거슬리고, 이웃으로 밀려드는 아시아계 이주민들이 도무지 못마땅해 거칠게 침을 뱉는다. 사별한 아내의 부탁으로 고해성사를 종용하는 신부에게 자신이 참전해서 겪었던 한국전쟁의 삶과 죽음을 전하는 노인은 단호하고 단단하다.      


그가 한평생 직장에서 만들고 애지중지 간직해온 자동차 <그랜 토리노>는 자신이 지켜온 나라와 신념에 대한 긍지와 자랑이다. 외롭게 캔맥주를 마시며 총으로 무장한 채 세상의 무질서를 비난하던 노인은 우연히 옆집 몽족 남매를 곤경에서 구해주고 작은 우정을 맺는다. 하지만 노인은 남매 집에 총탄을 뿌리고 몽족 누나를 납치하여 폭행한 동네 깡패들의 만행을 외면하지 않는다.  

       

보수와 진보의 차이는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 유무에 있다(유시민)고 했지만, 그랜 토리노를 사랑하고 전쟁 당시 소속되었던 부대마크가 새겨진 라이터를 품고 있는 노인에게는 틀린 말이다. 노인은 오만한 백인 보수주의자이고 대책 없는 마초이기 때문이다. 노인은 타락한 만용으로 무장한 깡패들을 응징하기 위해 정의를 위한 제물로 자신의 몸을 내놓는다. 홀로 깡패들의 거주지로 찾아가 그들의 총탄 세례에 쓰러진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역량으로 진보와 보수를 논한다면 한국에는 제대로 된 진보도 진정한 보수도 찾아보기 어렵다. 자신과 소속된 패거리들의 권력 욕망을 채우기 위해 타인을 유린하고 약자를 거침없이 이용하는 한국산 진보와 보수는 동전의 양면에 지나지 않는다. 진보와 보수를 사칭하는 양아치들과 공존 공생하는 언론과 법 기술자, 학자들과 종교 마피아들이 조작하는 대한민국은 아이의 울음과 젊은이들의 웃음소리가 희미해진다.

   

정다운 노래와 대화가 사라지고 고소고발이 난무하는 헐벗은 시간 속에서 약자를 외면하지 않는 노인들의 나라를 그리워한다. 일생을 올곧게 살아오며 축적한 오랜 공감의 지혜가 절실하다. 보수면 어떻고 진보면 어떠하랴. 그따위 빛바랜 훈장들은 돼지 목에나 걸어라.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상실한 메마른 가슴에 악이 깃들 수 있다.(이기주, 말의 품격)’ 참된 노인의 품격을 타는 목마름으로 기다린다.     

작가의 이전글 월터의 상상력은 현실이 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